쓰나미를 맞은 비혼 주의자
뒤통수를 세게 맞다 편
지속은 덜덜 떨며 한 손에 콘돔을 들고 있었다. 이 새빨간 딸기가 프린팅 된 한 장의 쓰지 않은 콘돔은 지속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짱짱이는 이제 백일을 넘겨 목도 가누고 원이라는 어여쁜 이름으로 불렸다. 지속은 잠이 든 원이를 떠올리자 눈물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두 다리가 휘청거려 서있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병히의 출퇴근 가방 가장 구석진 주머니 속에서 딸기 콘돔을 발견한 것이다. 지속은 처음엔 연애 때 쓰던 게 남았구나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콘돔 표면에 찍힌 제조일자에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4개월 전에 만들어진 콘돔이었다. 즉 따끈따끈한 신상이란 소리였고 출산 후 회복 중인 지속과 병히는 관계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모유수유 중인 지속은 생리가 멈춰 부부 사이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누구와 쓰려고 저리도 은밀하게 숨겨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쓰고 남은 것을 다음을 기약하며 고이 모셔둔 것일까?
지속은 쓰나미가 휩쓸고 간 듯 난장판이 된 정신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막장드라마에서만 보던 일이 현실로 상영되고 있었다. 저녁시간, 병히는 퇴근 후 취미로 배우는 테니스 학원으로 갔고 한 번도 관심을 둔적 없던 병히 가방에 왠지 신경이 가던 지속의 호기심에 결국 이 사단을 맞이 한 것이었다.
지속은 출산 후 족히 15킬로는 불은 두툼한 뱃살을 손으로 한 번에 움켜쥐어봤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튼살이 징그러웠다. 번개를 맞아 생긴 듯 빗금으로 새겨진 자욱은 원이가 몸안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흔적이었지만 여자로선 치명적이었다. 비단 같던 살결은 온데간데없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따로 없었다. 이런 신체 변화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지속이었건만 병히의 변심은 그 모든 걸 헛되고 후회되는 일로 만들어버렸다.
지속은 딸기 콘돔을 꺼진 텔레비전 정중앙에 투명 테이프로 붙이고 병히를 기다렸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 순간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지속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병히는 꿈에도 몰랐겠지? 지옥에서 온 파이터가 눈에 불을 켜고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지속은 집안으로 들어선 병히를 보자마자 뺨을 힘껏 갈겼다. 드라마에서나 봤지. 현실에서 사람 뺨을 때릴 일이 있었겠는가. 그것도 생전 처음 때려본 상대가 남편이라니 지속은 뺨을 맞은 병히보다 더 아팠다.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는 병히에게 지속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그제야 콘돔을 본 병히는 잠시 주춤하더니 여유 있는 척 웃으며 아니 저건 하며 말을 잇자 지속은 다시 병히의 뺨을 갈겼다. 두 번 연속 때리니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어 한대를 더 때리려 손을 올리니 병히가 지속의 손목을 붙잡곤 오해라고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꿇어. 지속은 짧게 이 말을 내뱉곤 소파에 앉았다. 운동복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병히는 딸기 콘돔을 갖게 된 연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어디 한번 같이 들어보자. 병히의 변명이 지속에게 먹힐지.
같이 일하는 사촌 형 친구가 영업차 콘돔 두 상자를 사촌 형에게 줬는데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차에 둔 걸 본 형수가 난리가 났고 사네 마네 나를 못 믿냐 이혼하자 싸우곤 화가 나서 콘돔을 버리려 사무실에 갖고 왔다는 것. 그 소릴 들은 병히가 낄낄거리며 버리긴 왜 버리냐 나 하나 줘라 해서 받은 게 저 텔레비전에 붙은 딸기 콘돔이란다.
긴 변명을 들은 지속은 진지하게 병히를 죽여버릴까 고민했다. 그의 말이 진짜여도 병신 같고 거짓이라도 병신 같았기에 지속은 병히에게 실망했단 표현으로는 부족한 환멸 났다? 질렸다? 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지속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이자 병히는 스피커폰으로 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더니 형 그때 그 콘돔 얘기 좀 해줘 지속이 난리 났어 까지 말하자 듣고 있던 지속이 병히에게 욕을 하곤 폰을 집어던져버렸다.
지속은 역시 결혼생활은 체질이 아니라고 병히와 이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병히를 앞장 세워 함께 주차장으로 가서 자동차 블랙박스 유심칩을 빼왔다. 부정의 증거를 더 잡기 위해 병히에게 카드결제 내역을 내일까지 뽑아오라고 아니면 피눈물을 뽑아주겠다 협박하니 병히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영겁 같았던 밤이 지나고 있었다. 지속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최대한 위자료를 많이 받아 원이와 고향으로 내려가 살 궁리를 했다. 딸과 단둘이 사는 삶을 그려보니 지금보다 썩 나쁘지 않았다. 엄마 아빠의 그늘이 지속과 원이를 뜨거운 뙤약볕으로부터 지켜주리란 믿음이 있었기에. 그리고 병히가 없어도 괜찮겠단 생각에 다다르자 활화산처럼 이글거리는 분노가 식어감을 느꼈다. 비혼 주의자 지속의 결혼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이제 돌싱의 연애 생활이란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는 것일까?
오!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