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은 억울하고 분했다. 첫 남자 병히와 결혼해 지금까지 삶에서 이성이라곤 병히가 전부였다. 지속은 병히 하나로 만족이 됐는데 병히는 아니었단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살을 빼야 했다. 이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이혼한다면 병히가 자신을 조심도 아쉬워하지 않을 거라고. 병히에게 참혹한 후회를 주는 이별이 최고의 복수라 생각한 지속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창 예쁠 때 남자를 깊게 만나볼걸 후회스러웠다. 명재랑도 자고 영호랑도 자고 보이는 남자를 붙잡고 누구라도 자볼걸. 지속은 진심으로 후회했다.
지속은 혼전순결 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강제 혼전 순결 주의자로 아무도 지속을 모텔로 꾀어낸 이가 없었다. 사실 지속은 신문물 영상을 접하여 나름 깨인 여성이었는데 모태솔로란 소리에 지레 겁을 주워 먹던 남자들이었다.(개척 정신이 없던 놈들이지 뭐) 손목만 잡혀도 책임지라며 엉겨 붙을까 무서웠나? 암튼 지속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정신상태는 세상 더러운 난봉꾼인데 육신은 그렇지 못했으니 지속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럼에도 일부종사하며 병히를 오직 하나의 태양으로 여기고 다른 남자들을 깜빡이는 전구알 정도로 여겼으니. 이 시대의 정절녀가 아니던가. 구청에서 열녀비를 지속의 집 아파트 입구에 세워줘야 할 정도였다.
아! 한 가지 이점은 있었다. 지속은 딴 남자와 자본적이 없으므로 만약 성병이나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걸린다면 매개체는 병히 하나니 잡아 족칠 수 있었다. 범인의 족적이 오롯이 새겨지는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이니 뻔했다.
지속은 이참에 산부인과 진료도 받고 병히가 저지른 부정의 증거물을 하나하나 수집하기로 했다. 아직 어린 원이 때문에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갈 수도 없고 지속은 전화상담을 받았다. 그리곤 변호사와의 통화로 충격을 받았다. 배우자의 외도가 의심된다 해도 이를 뒷받침할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콘돔을 가지고 있다는 사유만으로는 이혼을 제기하기 어렵다는 것.
병히와의 이혼 후 날개를 달고 그동안 상상의 나래로 펼쳤던 난봉꾼의 삶을 리얼로 살고자 했던 지속의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게다가 병히가 가지고 온 카드내역은 더 참담했다. 매일의 커피 한잔과 점심식사가 결제내역의 전부였다. 몹시 성실한 가장의 소비였다. 블랙박스 영상 속 병히는 집과 사무실만 쳇바퀴 돌듯 다니고 있었다. 유흥업소나 오피스텔, 모텔을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지속은 이 새끼가 두 발로 걸어가서 현금을 냈구나. 멍청이도 아니고 성매매에 누가 카드를 긁을까. 여전히 매서운 의심의 눈초리를 겨누는 지속이었다.
병히는 지속이 오해 살만 한 상황을 만든 것에 괴로워했고 또 미안해했다. 집에 와서도 지속이 건들지 않고 방치해둔 빨래와 설거지, 청소 모두 병히의 몫이었다. 지속은 오로지 원이만 챙기고 돌봤으며 병히가 시리얼을 먹던 라면을 먹던 관심이 없었다.
집안의 온기는 사라지고 냉랭함만 감돌았다. 원이가 일찍 잠든 어느 날 병히는 다시 지속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오해를 사고 속상하게 만들어 미안하다며 자신에겐 오직 지속과 원이뿐이고 이혼을 한다면 죽는 게 낫다고 울면서 말하는 병히를 지속은 표정 없이 바라봤다. 얼굴이 일그러진 채 우는 병히는 지속이 사랑한 28살 순수했던 모솔남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속은 남편이 없어도 상관없었지만 어린 원이에게 아빠를 빼앗아도 될지 마음이 흔들렸다. 사죄하는 병히를 보며 지속의 두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난봉꾼이 되는 게 이번 생은 글러서 운 건 아니었다. 병히와의 결혼생활이 불행했고 또다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목에 건 기분이 들어 눈물이 났다.
그렇게 개줄을 목에 건 지속은 이혼을 유예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병히를 향한 마음이 식었다는 것. 그리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원이가 어서어서 자라나 독립이 가능해지면 목에 차고 있던 개 목걸이만 덩그러니 탁자 위에 남긴 채 지속은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