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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형 금쪽이는 왜 반장이 되고 싶을까아?

by 유이언

고등학교 때 미국에 유학 가기 전까지 나는 거의 단 한 번도 반장을 놓쳐본 적이 없다. 전교에서 성적으로 선두를 다투는 수재도 아니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잘 노는 애도 아니었지만 내 이름 대신 반장으로 불리는 날이 더 많았다.


반장이 되려면 일단 반장선거에 나가 수많은 아이들 앞에서 선거 연설을 해야 하고, 반장이 된 후에도 모두를 제치고 앞장서서 리더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서른다섯을 먹고도 여전히 미용실에서의 스몰토크를 겁내하는 나로서는 누가 볼 때 참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였다.


누군가 나를 추천하지 않아도 어쭙잖게 손을 들며 스스로를 추천하고 어떻게든 반장이 되어야 했던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반장이 되면 선생님과 아이들이 필요에 의해서라도 내게 먼저 말을 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매년 시작되는 새 학기는 나에게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다.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교실 이 모든 환경이 내게는 스트레스의 집약체였다. 새로운 집단에서 나를 알리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머리가 아득할 정도의 압박이었다.


특히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백 번을 생각하다가 '아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있을래'하고 포기했던 적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반장이 되면 학급에 있는 약 서른 명의 아이들에게 일일이 내가 인사를 건네고 나에 대해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에게 나를 각인시킬 수 있었고, 반장이 되면 그들이 사무적인 이유 때문에서라도 먼저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반장들은 아이들의 숙제를 걷어서 선생님한테 제출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사소한 업무에서 아이들이 내게 말을 걸고 라포를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들에게 말을 먼저 거는 것이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때는 그게 심장이 철렁할 정도의 스트레스였다.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어딘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반장이 된 나는 아이들과 퍽 문제없이 두루두루 잘 지냈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가 끝나면 나는 집에 우는 아기를 두고 온 엄마처럼 부리나케 학교를 빠져나와 집을 향해 경보를 하며 걸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에 거의 8시간을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과 공부하고 밥을 먹는 생활 자체가 기가 빨렸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친구들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냅다 집으로 도망쳤다. 누가 나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기를 기다리며 쭈뼛쭈뼛 뻗대고 있는 것은 스스로 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부리나케 집에 도착해서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며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겪은 모든 스트레스를 풀어냈던 것 같다. 아빠는 원체 바쁘기도 했지만 내게 말 한 번 먼저 걸어주는 적이 없었기에 가족 내에서 내 애착대상은 오로지 엄마뿐이었다. 사춘기 때는 보통 가족을 멀리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련만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늘 엄마에게 깊은 애착을 가졌다. 엄마가 성적을 가지고 나무랄 때면 아빠와 동생이 자리를 피해줄 정도로 모자가 불꽃 튀기게 싸우면서도 그래도 그렇게 서로를 좋아하고 의지했다.


친구들에게 먼저 말조차 걸기 어려워 차라리 눈 딱 감고 반장이 되었던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아이 아빠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서른다섯이 되어버렸다. 바닥도 쳐보고 굶어도 보니 이제는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성으로 세상에 나가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번다. 새파랗게 어린 PD에게 다음에도 꼭 써달라고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영업 멘트를 하고, 인성을 빻은 업계 사람들에게도 손절의 욕구를 참고 계속 나의 존재를 알리고 호감을 주려 한다. 돈이 있건 없건 먹고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위치에서 고행인 것은 맞지만 타고난 내향인이 생존을 위해 가짜 E가 되는 과정이 때론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생존을 위해 사회인이 된 내가 가끔은 꽤 자랑스럽다가도 이렇게 까지 본성을 거스르며 애쓰며 사는 어른이 된 것이 때로 씁쓸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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