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미평양냉면, 강남구청, 결혼을 논하는 이십대 후반
2025년 1월 25일, 토요일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내게 최애 음식이 뭐냐고 물을 때면, 일 초의 고민도 없이 '평양냉면'이라는 답을 꺼내 놓는다. 이전까지는 내가 어떤 답을 했는지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평냉이 아닌 다른 음식은 이제 뇌리에 발끝조차 들이밀지 못하는 실정이다.
평양냉면 매니아라는 사실을 주변에 오픈하고 나면, 백이면 백 자동으로 이어지는 꼬리 질문이 있다.
"그럼 최애 평양냉면집이 어디에요?"
하...
머글의 순수한 질문에 덕후는 퍽 난감해진다.
바로 하나를 꼽자니 비속어를 섞어가며 '맛있다'를 연신 외쳤던 여러 가게들이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르고, 또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을 하자니 평냉에 반쯤 미쳐있는 나의 진심이 퇴색될 것이라는 생각에 차마 입을 떼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질문을 한 상대 쪽에서 "뭐야. 평냉 좋아한다더니 대답도 제대로 못하네."라고 생각할까 봐 괜스레 마음이 더 초조해진다.
며칠 전에도 같은 팀 동료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런 질문을 한 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닌데, 더 이상 이런 상황은 평냉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는 무언가 확실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설령 200% 찐텐으로 좋아하는 곳이 아니면 어때.
어쨌든 누군가 내게 최애 평냉집을 물어 왔을 때 당장 꺼내 놓을 수 있는 나만의 답이,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하나만 있으면 됐다.
서론이 길었는데,
그 진절머리 나는 질문의 디폴트 대답이 된 곳은 바로 '진미평양냉면'이다.
평냉 좋다는 사람들 중에 여길 최고로 꼽는 이들이 꽤 많을 것이기 때문에 조금 식상한 대답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근본이 있는 곳이라는 말씀.
지난 1월, 강남구청역 인근의 진미평양냉면에서는 냉쫓사 멤버들의 신년 모임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 명이 불참을 선언했지만, 우리에겐 한 가지 룰이 있었다.
세 명 이상 참석을 확정한 경우, 약속을 취소하지 않는다는 것.
모두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보다는 맛있는 냉면을 먹는 게 아주 조금 더 중요한 우리들이기에, 세 사람은 망설임 없이 진미평양냉면에서 새해 첫 만남을 가졌다.
(사실은 냉면이 2만 배는 더 중요함)
벌써 네 번이나 이곳을 찾은 나는 우리 멤버들 중 진미평양냉면 방문 경험이 가장 많았다.
학동역과 강남구청역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 자리한 탓에 교통 편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여길 찾았던 걸 보면 어지간히 맘에 들긴 했나 보다.
어쩌면 내가 어느 냉면집을 최애로 꼽을지에 대한 답은 이미 맘속에 정해놓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허물없이 친한 친구 사이라 한들, 매달 한 번씩 만나는 건 의외로 너무 자주 본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사실 서로를 보고 싶다기 보다는 매달 돌아가면서 새로운 평양냉면을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 클 테지만... 그래도 각자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약속 시간을 잡기도 전에 “벌써 한 달이 지났다고?”라는 생각이 앞선다.
나날이 냉혹할 정도로 빠르게 흐르는 시간의 속도에 충격을 금치 못하는 이십대 후반들이다.
어느덧 서른을 앞둔 네 녀석들은 언제나 토크에 목말라 있다. 술담배도, 게임도, 그 어떠한 유흥도 즐기지 않는 우리에게 무슨 재미로 만나서 노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우린 정말 토크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단, 다들 하나같이 말이 정말 많고 웬만한 드립들은 거를 타선이 없다. 나 역시 스스로 다말증 환자라 말하고 다닐 정도로 누구 못지않은 투머치토커라 생각하는데, 여기선 기를 전부 펴지 못할 정도로 친구들의 수다력이 강력하다. 물론, 단순히 말이 많기만 한 건 아니다. 얘네들을 처음 봤던 고등학교 때부터 느꼈지만, 다들 개그 쪽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길을 잘못 잡아버렸다고 생각한다. 뭐, 덕분에 나 혼자 1인 관객으로 하이 개그를 독점해서 즐길 수 있게 됐으니 오히려 더 좋은 것일지도.
하지만, 오랜 친구들을 거의 매달 만나려고 하니 아무리 토크에 특화된 인간들이라한들 서로의 흥미를 끌어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몇 번을 들어도 웃음이 끊이질 않는 추억팔이용 에피소드들도 매달 들으면 지겨워지는 법이다. (사실 아직 안 질리긴 했다.)
나의 경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기에 친구들의 관심을 끌만한 이슈가 바닥 나버렸고, 다른 녀석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이슈들을 몰고 다니기 시작한 H가 단숨에 따분함을 박살내버릴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어제 여자친구가 결혼 얘기 꺼냈어.“
올 것이 왔다.
‘드디어’라기보단 ‘벌써?’에 가깝긴 했다.
물론 한 2-3년 전부터 몇몇 친구들이 지인이나 학교 선후배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접해 오긴 했다. 하지만, 내 친구의 입을 통해서 결혼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린 아직 20대이기에 결혼은 너무 이르다고만 생각했다. 특히 나는 오랜 인간관계의 가뭄을 겪고 있는 터라 운좋게(?)도 직접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온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결혼이란 제도는 나,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과도 전혀 관계 없는 것이라고만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불쑥 결혼을 논하고 있었다.
형제나 친구, 지인도 아닌 본인의 결혼을.
친구들에 대한 나의 시각은 여전히 미친(positive) 바보 짓을 일삼던 고등학교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새 시곗바늘은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조용하게. 나의 정신이 계속 제자리에 놓인 채 성장의 유예를 겪고 있는 동안, 현실의 친구는 올바른 시간대의 흐름에 발맞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H가 당장 결혼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연상인 여자친구는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시기였고, 장기 연애에 접어든지도 꽤 됐으니 충분히 결혼 얘기를 꺼내볼만도 했다.
솔직히 친구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H가 토로한 고민에 깊이 집중할 수 없었다. 친구의 결혼이라는 소재가 잠시 잊고 살았던 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 기폭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결혼 생각 아예 없는거지?”
다들 돌아가면서 결혼 얘길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내 차례도 왔다.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던 사람이 통 없어서 그런지 퍽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응. 안 하지…“
이미 오래 전부터 스스로를 비혼주의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겐 딱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니다. 그런데도 유독 대답에 힘이 없었던 건 아마 직전에 H의 결혼 고민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여느 때와 똑같은 대답을 내뱉고 있음에도 기분이 사뭇 달랐다. H는 물론이고 S와 C까지 모두 결혼 생각이 있다고 했다. (사실 주변의 또래 남자 애들은 대부분 결혼에 긍정적이다.) 물론 잘 맞는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왠지 세 사람은 모두 결혼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 나쁜 나랑 이렇게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는 것을 보면, 웬만한 사람들과는 어울리는 데 문제 없을 게 분명하다.
그 말은 즉슨, 언젠가 나는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나는 그래도 정말 괜찮은가? 스스로에게 여러 차례 되묻게 됐다. 안 그래도 벌써부터 인간관계가 좁아서 탈인데, 과연 나는 외로움으로부터 끝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결혼을 한다고 친구들과 쉽게 멀어지진 않겠지만 언제나 지금처럼 천진하게 어울릴 수만은 없다는 것은 안다. 친구들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방향을 걸어가는 그들의 삶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나와 내 친구들은 분명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현실은 늘 녹록지 않은 법이지 않나. 그래서 우리의 미래가 맘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은 그리 크지 않다.
입은 냉면에 집중하면서도 머릿속은 계속해서 온갖 잡념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H의 근황이 너무나도 따끈따끈해서 내 얘긴 꺼내볼 생각도 못했는데, 결국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대화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평냉을 먹고 있는데도 왜 집중을 하질 못하니…
그 정도로 H의 결혼 이슈는 내 정신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H에겐 퀸가비의 결미새 또또처럼 오로지 나의 재미를 위해 일단 한 번 결혼해보라고 거듭 말했지만...
사실은 애써 쿨한 척 해 본 거다.
한 개도 재미 없다. 오히려 심각해지기만 할 뿐.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H는 지금의 여자친구와 일 년 안에 결혼을 할 것인가. 만일 제일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가게 된다면, 나는 어떤 기분으로 다녀오게 될까. 친구에게 보내는 축하는 백 퍼센트 진심이 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언제나 남들보다 몇 발 앞서 나가는 망상력을 발휘하는 탓에 지금의 상상이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따라 나의 생각은 평소보다 더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밤은 유독 외로웠다.
고독이란 늘 나의 무의식 한켠에 자리해 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현실을 직시한 순간 그 감정은 뚜렷한 형체를 갖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참 오래토록 내 감정을 무시한 채로 살았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도 뭔가 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왔다. 친구들이 언제까지 내 옆에 같은 모습으로 딱 붙어있어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고, 아직 젊기만 한 우리들의 상황은 앞으로도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나도 지금처럼 안정된 관계 속에서 안주하기보단 관계를 확장해가며 독립심을 더 기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게으르고, 도전적이지 못한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부딪혀 보는 거지 뭐.
글을 마치며..
보면 알겠지만, 사실 냉면은 거들 뿐이다.
냉면은 그저 나와 친구들 간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대화를 이어주는 매개체일 뿐 글의 핵심은 냉쫓사 모임 당일에 나온 온갖 이야기들이다. 아직 초반이라 지금의 방향성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대한 많이 올려보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