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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을 쫓는 사람들 - EP.1

부원면옥, 남대문시장

by popofilm


'냉을 쫓는 사람들' 시리즈를 처음부터 시간순으로 연재하려면, 3년 정도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초인의 기억력을 가진 것은 아니기에 과거를 완전히 복기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고 마냥 기억을 모두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래서 우선은 급한 대로

제일 최근에 다녀온 곳들(혹은 혼자 다녀온 식당들)부터 먼저 다뤄보려고 한다.



* 2025년 2월 13일, 목요일


평양냉면에 빠진 지도 어연 3년.

서울에 있는 가게들을 도장 깨기 하듯 순회하다 보니 발 닿지 않은 곳을 찾는 게 쉽지 않아졌다.

8c91f0550561d7aeb417605fc8e69b98.jpg 새로운 곳!! 도파민 원해!!

그런데 아주 가끔, 특별한 일정으로 새로운 동네를 방문하게 될 때 인근에 미개척 평냉집이 있다면 그것만큼 내게 강한 설렘을 가져다주는 일은 없다. "이 주변에 평냉집이 있다고?"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아직 내 발이 닿지 못한 가게라는 옵션까지 추가로 더해진다면 그 순간까지 나를 고통받게 했던 현생으로부터 잠시 해방되는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평소 나서서 오버하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하고, 스스로도 그런 행동들을 무척 꺼리지만 평양냉면에 한해서는 한없는 주책바가지이다.)

하루 시청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점심도 근처에서 해결해야 했던 나는 언제나처럼 주변 맛집을 미리 서치했다.

평소 내가 혼자 밥을 먹을 때마저 평양냉면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치가 중구/종로구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서울에서 평양냉면집이 가장 많이 분포한 이 지역에서 만큼은, 나의 평냉 조합원들이 함께하지 않은 자리라 할지라도, 반드시 평양냉면을 먹어줘야 한다.

그날은 운이 꽤 좋았다.

오전 일정이 예정보다 일찍 끝났고, 덕분에 평소보다 점심을 여유 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굳이 버스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미개척 평양냉면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평냉 모임 출석률 100%를 자랑하던 내가 유일하게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던 곳, '부원면옥'이 바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찌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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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남대문시장에 도착했다.

평일 오전인데도 시장에는 구경 온 사람들이 많았다.

한창 일하고 있어야 할 이 시간에 내가 여기에 나돌아 다니고 있어도 되나?

낯선 시공간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이질감에 잠시 스스로가 이방인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수많은 가게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재래시장 틈새에 평냉 노포가 숨어 있단 말이지?

이건 맛집일 게 분명했다.

아니, 맛집이 아니고서는 못 배긴다.

그렇게 가게에 점점 당도할수록 차마 나는 표정에 선명하게 어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외관에서부터 힘숨찐의 냄새가 제대로 난다.

노란 바탕에 빨간 고딕체로 쓰인 '부원면옥' 네 글자.

눈에 띄는 원색의 색감부터 이미 강렬했다.

교통 표지판을 닮은 것도 같은 저 간판은 마치 '찐맛집'임을 미리 경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높은 곳에 큼지막하게 달려 있던 간판과 달리 가게의 입구는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로 들어가야 하나 잠시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상가 2층 계단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일단 직진부터 하고 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도 찾지 못할 때가 꽤 많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눈앞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주방이었다.

식당 입구 바로 앞에서 빈대떡을 부치고 계시는 광경을 마주한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구조의 식당을 본 적이 있었던가?

마치 남의 조리실에 무단으로 침입한 기분이 들었다.

(BGM. 몬스타엑스 - 무단침입)


(빈대떡 부치는 냄새로 유인해 사이드 메뉴 주문을 유도하려는 고도의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망상이다.

주방을 뒤로한 채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보았던 위엄 돋는 노포의 예스러운 분위기와 달리 내부는 비교적 깔끔했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 한창 무르익을 시간보다 일찍 방문한 덕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고, 그 고요함이 내게 깔끔함으로 전달됐는지도 모르겠다.

가게 곳곳에는 부원면옥의 오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나 기사들이 붙여져 있었다.

부원면옥은 무려 1960년부터 장사를 시작한, 6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가게라고 한다.

하지만 오랜 역사에 비해 을지면옥, 우래옥, 필동면옥 등 인근을 주름잡고 있는 절대 강호들에 비해선 왠지 인지도가 높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도 냉쫓사 모임 친구들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부원면옥의 존재를 몰랐으니 말이다. 자칭 평양냉면 마니아들인 우리들도 모를 정도라면...

아마 일반 대중은 더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냥 우리의 내공이 아직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꽤 오랜 기간 맛집 계정을 운영하며 체득한 진리가 있다면, 인지도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

65년의 전통이 괜히 만들어졌겠는가?

단골들로부터 얻은 두터운 신뢰와 음식의 퀄리티가 없었다면, 결코 이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뭘 또 역사 얘기까지)


그렇게 나는 음식에 대한 부푼 기대감과 '숫자'에서 가져다주는 높은 신뢰감을 믿고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곧바로 물냉면을 주문했다.

주문이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면수가 나왔다.

요즘은 면수를 안 챙겨주는 곳들도 많아서 일단 식사가 나오기 전에 면수부터 나오는 곳들은 괜히 입도 떼기 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진다. 냉면을 먹기 전에 면수를 홀짝이며 입맛을 다시는 게 냉면 애호가들이 얼마나 좋아하는 순간인데... 생각만큼 진한 풍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면수를 챙겨준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오늘의 주인공, 부원면옥의 (평양)물냉면이다.

우선 10,500원 밖에 되지 않는 착한 가격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물가가 물가인지라 만 오천 원 미만의 평양냉면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시장에 위치한 탓에 가격이 저렴하게 책정된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렴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 정도 가격에 평양냉면 한 그릇을 맛볼 수 있다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다.

사실 가격보다 놀라운 건 냉면의 '맛'이었다.

그동안 꽤 많은 평양냉면 점포들을 다녀보았지만, 부원면옥의 냉면은 이전까지 접해본 냉면들과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내가 무슨 미식 평론가도 아니고, 모든 평양냉면의 맛을 구분하고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절대 미각의 소유자는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 예민한 미각을 가진 나로서는 이곳 냉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이 적지 않았다.


우선 제일 먼저 눈과 혀를 모두 자극했던 건 오동통한 면발이었다.

다른 가게들과 비교했을 때, 꽤나 두껍고 통통한 면을 사용하는 듯했다.

개인적으로 냉면에 한해서는 얇은 면발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평소 면의 쫄깃한 식감도 굉장히 좋아하는지라 이렇게 두꺼운 면으로 만든 냉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메밀의 함량이 다른 곳들에 비해 적은 편인 걸까?

면을 씹을 때나 향을 맡았을 때 구수한 메밀향이 강하게 나진 않았다.

오히려 난 좋았다. 사실 진한 메밀향을 별로 선호하지는 않거든.

고로 면에 있어서는 내 보편적인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셈이었다.

다음은 동치미 육수 특유의 달큰한 맛.

전에 남포면옥에서 접했던 낯선 풍미와 익숙했는데, 마냥 비슷하진 않았다. 부원면옥의 냉면이 더 훨씬 강한 단맛을 풍겼달까. 개인적으로 단맛이 너무 강한 평양냉면 육수는 내 입맛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그래서 남포면옥과는 잘 맞지 않았던), 여긴 달콤함과 새콤함이 동시에 느껴진 덕분인지 오묘한 매력에 자꾸만 끌렸다.


반전은, 동치미 육수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것. 이 독특한 풍미의 비결은 다름 아닌 양파라고 했다. 소 사골 육수를 낼 때 양파를 껍질째 넣고 같이 끓인다고. 어쩐지 단맛이 나긴 하는데, 동치미 육수를 썼다고 알려진 곳들과는 풍미가 다르다 싶었다.


어쨌든 맛있다.

평양냉면 초심자들도 어렵지 않게 도전해 봐도 좋을 법한 냉면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평양냉면 마니아들 사이에서 취향을 조금 탈 것 같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고기 고명으로 수육이 올라간다는 것.

제육보다 수육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김치나 매콤한 무절임 같은 반찬이 따로 제공되지 않았다.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건 고명으로 올라간 무 절임과 두 조각낸 삶은 달걀, 씹으면 뽀득뽀득 소리가 날 것 같은 오이 절임이 전부였다. 다른 가게들과 비교했을 때, 고명이 많이 올라가는 편이라 굳이 반찬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김치가 있으면 좋은데, 없어도 상관은 없다.

솔직히 김치를 같이 먹으면 냉면의 맛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입을 헹궈줘야 하는데, 방문한 가게가 김치 맛집이라면 퍽 난감해지거든. 김치 없이 깔끔하게 냉면에만 집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굳이 더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사실 아쉬운 건 따로 있었다.

'부원면옥'은 냉면뿐 아니라 닭무침과 빈대떡이 시그니처로 알려져 있는데, 혼자 방문한 터라 곁들임 메뉴까지 넘볼 수는 없었다. 닭무침은 진짜 궁금했는데... 나는 필히 우리 모임원들과의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아쉬움의 눈물을 머금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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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처럼 소식좌가 아니라면 혼자서 냉면 한 그릇에 빈대떡까지 맛보는 호사를 누려볼 만하지 않을까? 빈대떡이 단돈 5,500원이라 웬만한 곳에서는 냉면 한 그릇 밖에 못 먹는 금액으로 '냉면+빈대떡' 세트를 제공해 준다는데, 어찌 거절할 방도가 있겠는가. 내가 소식가만 아니었다면, 절대 못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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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의 고급화가 나날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토록 착한 가격의 냉면을 맛볼 수 있음에 감사한 하루였다. 이런 게 전통시장의 인심인 건가..? 여기에 맛까지 깔쌈하게 따라주니 내가 돈을 덜 쓴 것 말고는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빠른 시일 내의 재방문을 다짐하며 이번 달의 깜짝 여정도 홀로 무사히 마쳤다. 평양냉면은 혼자 먹으러 다니는 것도 언제든 좋지만, 역시 냉쫓사 멤버들이 전부 함께할 때 비로소 콘텐츠가 완전해지는 듯하다. 그러니 다음 편을 더 기대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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