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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을 쫓는 사람들 - EP. 4 온랭

온랭, 성산동, 평냉이 세상을 구한다

by popofilm

2024년 10월 4일, 늦은 점심

이십 년이 넘도록 작심삼일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제가, 드디어 3화를 넘겼습니다.

물론 소재가 언제 고갈될지 몰라 여전히 연재 자체가 위태위태한 상황이지만, 오늘도 냉쫓사 에세이는 어떻게든 굴러갑니다.

시작에 앞서 갑자기 2024년으로 시간을 역행하는 게 의아하실 텐데요.

일단은 그동안 모아놓은 저희들의 평냉 아카이브를 최대한 털어보는 게 이 컨텐츠의 주된 목적이라 그렇습니다. (사실 최근 계속 모임이 뜸했던 게 크리티컬했지만요)


거짓말로 방문 날짜를 속인 후 마치 최근에 다녀온 것처럼 꾸며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정성스레 누군가를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머리 굴려가며 쓰고 싶진 않거든요.

(준비된 지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2024년 9월...

인생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던 제가 오랜만에 십 년 지기 친구들을 소환했습니다.

주변의 누구와도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아 반 년 넘게 잠수 아닌 잠수를 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고립시키다간 정말 큰일이라도 나겠다 싶어 친구 H(자주 나오는 그 친구 맞습니다)에게 SOS를 청했습니다. 여전히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던 제 마지막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필요없는 관계란 바로 이런 걸 뜻하는 걸까요?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고 무작정 잠수를 타버린 제가 꼴사나웠을 수 있었을 텐데도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제 연락을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했던 시간들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간 머쓱해졌지만, 절대 티는 안 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써봤습니다.


어쩌면, 저는 친구들이 이렇게 나올 줄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스스로가 비겁하고 간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시기엔 정말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제 상황을 이해해준 친구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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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재개된 계기는 역시나 평양냉면입니다.

이젠 다들 각자 알아서 평양냉면을 즐길 정도로 모두가 마니아의 경지에 이르렀는데요.

저 때문에 한동안 모임이 성사되지 못했던 탓인지 다들 이전처럼 자주 먹진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저는 저희 모임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통감했는데요.

이를 무마라도 하겠다는 듯 큰 맘 먹고 약 일 년 만에 평냉 모임을 직접 주최했습니다.


다른 친구 L과 C는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제 근황을 따져묻기 보다는 평양냉면을 향해 환호성을 내지르더군요. 순간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며 그들만의 방식대로 저를 배려해준 것일 거라고 생각을 고쳐 먹었습니다.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제 맘대로 생각할 겁니다.)


여기서도 친구들 탓을 하면, 저는 진짜 양심을 팔아 먹은 놈이나 다름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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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엔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찰나,

새로 생긴 평냉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평냉으로 끌어올린 친구들의 도파민을 최대치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신상 맛집만한 자극제가 없기 마련이니까요. 사실 지난 2년간 서울의 절대강자로 꼽히는 평냉집은 대부분 섭렵한 터라 신선함이 필요한 최적의 시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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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장(?)의 역할을 자처해왔던 제가 발벗고 나서니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정모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는데요. 나와 함께 평냉의 길로 따라준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말 없이 자취를 감추는 짓 따위는 절대 저지르진 말아야겠다는 일종의 자기반성(?)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냉은 혼자서도, 다른 사람이랑도 충분히 먹을 수 있지만, 우리 넷이 함께 먹을 때가 가장 맛있고, 흥분되는 법이니까요.


여름의 끝이 보일락말락하던 10월의 오후,

주말의 앞뒤로 휴일이 연달아 붙은 장기 연휴 덕분에 네 사람이 모두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바로 전날 긴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한 저도 피곤을 무릅쓰고 성산동의 골목을 찾았는데요. 다들 오랜만의 평냉에 흥분한 건지 지각생 하나 없이 모두 제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H를 제외하면 거의 일 년 만에 만난 거나 다름 없었지만 마치 어제도 봤었던 것처럼 어색한 기류 따위는 없었습니다. 역시 친구는 뭐니뭐니해도 옛날 친구들이 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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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소개팅의 대가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생김새만 보고 무당집인 줄 알았는데... 진짜 소개팅을 매칭시켜주는 곳이더군요.

얼마나 자신 있으면 본인 스스로를 소개왕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건지...

정말이지 별의별 직업이 다 있는 세상입니다.


(솔직히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일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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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개왕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방문 당시 오픈한 지 얼마 안 됐던 '온랭'이라는 평양냉면 전문점에 도착했습니다.

따뜻함과 차가움을 모두 품은 상호명에서 중용의 기운이 느껴졌는데요. 아마 따뜻한 국물류와 시원한 면류를 한 공간에서 맛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단순한 이름이지만, '~면옥'이라는 흔한 이름이 붙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선하다고 봅니다.


솔직히 '~면옥'으로 끝나는 냉면집? 너무 많습니다.

이걸 동네별로 하나하나 구분해낼 수 있는 레벨은 되어야 진정한 평냉 마니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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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솔직히 냉면으로 인물 퀴즈 한 번 해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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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을 본격적으로 때려넣기에 앞서 우리의 에피타이저, 만두로 식욕을 끌어올립니다.

냉면 한 그릇만 먹기엔 조금 섭섭한 저희는 매번 곁들임 메뉴를 최소 하나 이상 시키곤 하는데요. 녹두전과 만두를 모두 파는 곳에서는 늘 두 개의 선택지가 팽팽하게 맞섭니다. 맘 같아선 둘 다 맛보고 싶지만... 저희는 그렇게 흥청망청 사는 20대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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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이름에서도 느꼈지만, 화합이 참으로 돋보이는 가게였습니다.

바로 만두를 낱개로 판매하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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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1알? 이런 말 처음 들어)


덕분에 우린 유재석과 조세호처럼 네가 두 개를 먹었네, 세 개를 먹었네 하며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당 하나씩 사이 좋게 나눠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늘 하나 밖에 먹지 못했던 소식좌는 대만족하며 만두 하나를 시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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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기... 냉면 맛집인 줄 알았는데, 만두도 맛집입니다.

숙주, 고기, 두부 등으로 속을 채운 이북식 만두인데, 절대 슴슴하지 않습니다.

녹두전도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낱개로도 주문 가능한 만두를 놓친다는 건 정말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냉면과도 잘 어울리고, 그 자체로도 맛있으니 꼭 하나라도 시켜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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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평양냉면입니다.

정말 예쁘게 생기지 않았나요? 사실 저는 이제 음식에 대한 객관적인 미적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죄송한데 내 새끼라 그렇습니다.

이젠 평냉이면 다 예뻐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동의하지 못하시겠다면, 돌아가서 여러분의 새끼나 신경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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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한지 얼마 안 된 곳이라 엄청난 맛을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보통 몇십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허름한 노포에서 먹는 평양냉면이 가장 맛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실제로, 전통이 있는 가게에서 맛본 냉면들은 맛이 뭔가 다르긴 했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 취향을 타긴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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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랭의 평양냉면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호불호 없이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스타일의 냉면입니다. 아마 평냉 초심자들도 쉽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육수의 간이 제법 들어간 편이라 제 기준에서는 조금 짭조름하게 느껴졌고, 육향의 강한 존재감도 두드러지는 편이었습니다. 바로 뽑은 메밀면의 쫄깃함과 적당한 염도의 시원한 육수,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지는 사태 수육 고명의 조화...


생각만으로도 다시 먹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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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나니 그동안의 못다한 이야기들이 입에서 술술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실 제가 지난 반 년 동안 친구들과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건 온전히 제 문제였어요. 사람들을 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온통 부정적인 것들 뿐이고, 저의 기분과 상황들이 주변에 나쁜 영향만 줄 것 같았거든요. 물론, 멘탈 건강한 제 친구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리는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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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냥 제가 옆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어둡게 만들고, 그 공간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것임은 확실했어요. 불만과 힘듦만 토로하는 친구를 누가 옆에 두고 싶어할까요? 그래서 친구들이 먼저 저와 거리를 두고 싶어하기 전에, 제가 먼저 벽을 세웠던 겁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나약한 제 스스로의 자기방어였던 셈이죠.


위로나 공감?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다들 각자의 힘듦이 있을 텐데, 무턱대고 그런 걸 요구할 수도 없고, 애초에 제 성격 자체가 타인의 위로를 쉽게 받아들이는 타입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동안 숨겨왔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불안정한 심리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대로 묵혀두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병을 만드는 행위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연락이 끊겼던 기간 동안 겪은 일들을 담담히 말하려 애썼고, 친구들도 평소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다들 취업 준비로 한창 고민이 많았던 때라 저 못지않게 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저의 미성숙함을 비방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친구들을 두고 혼자서만 끙끙 앓으려고 했던 과거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도 했고요.

저희 네 사람이 함께 모여 평양냉면을 먹은 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유독 느낀 바가 많았던 모임이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이 날을 계기로 저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건 바로 혹시나 내가 다시 또 인생에 암흑기가 찾아와 잠수를 타고 싶거나, 모두를 끊어내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친구들 간의 끈끈한 유대가 흔들림 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매달 마지막 주 주말에 꼭 평냉 모임을 열자는 것이었습니다. 목적이야 내 맘대로 갖다 붙인 것이지만, 평양냉면이라면 자다가도 반응하는 제 친구들도 마다할 이유는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만나면 재밌고, 말도 서로 잘 통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좋아하는 음식 같이 먹으면서 얼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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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건도 하나 달았습니다.

각자 바쁜 일정으로 부득이하게 불참하게 될 수도 있으니, 세 명 이상이 참석할 수 있을 경우 모임의 취소는 없다는 것. 모두의 필참 조건을 달았다가는 취소될 가능성도 크고, 얼마 못가 흐지부지 돼서 정모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우려했던 일은 이미 수 차례 일어났지만요)


고등학교 동창인 저희 네 사람이 평양냉면으로 결속된 건 몇 년 전의 일이지만, 냉쫓사 모임이 본격화된 것은 바로 이 날부터입니다. 확실히 이때를 기점으로 저희가 만나는 빈도 수가 급격히 늘었거든요. 덕분에 저는 평양냉면으로 컨텐츠도 하나 팔 수 있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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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랑 친구하긴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냉쫓사의 평냉 탐방기는 이번 여름에도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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