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 남대문, 내 절친들이 나의 유산을 노린다
2025년 5월 24일, 토요일 늦은 점심
이 컨텐츠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정기 연재가 SSAP가능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저는 그렇게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놈이 아니었습니다.
봐 주시는 분들은 얼마 없지만, 3편을 시작함에 앞서 심심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사실 그간의 공백을 이해해주셔야 하는 게...
냉쫓사 에세이를 시작함과 동시에 저희 모임이 파토날 위기에 처했었답니다.
각자의 바쁜 일정으로 두 달 연속 캔슬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를 찾지 않게 되어버린...
우정이란 그렇게 얇고도 길게 유지되는 법이지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지난 번 정모에서 가장 큰 이슈를 물어다주었던 H가 큰 맘 먹고 공지를 때립니다.
솔직히 현생이 고달파서 이번 모임은 스킵하고 싶었지만...
평냉이 저를 부르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나이까...
5월의 냉쫓사 멤버들이 모인 장소는 지난 2월, 웨이팅 이슈로 방문에 실패한 '서령'입니다.
예, 제가 참 좋아하는 곳인데요.
지난 번엔 냉쫓사 모임 바로 하루 전날, 하필 성시경 님이 먹을텐데 컨텐츠로 업로드하는 바람에 웨이팅지옥을 직격타로 맞아 눈물을 삼키며 방문을 포기해야만 했답니다. 물론 한 번 당한 게 있으니 이번엔 다른 곳으로 가볼 법도 했지만, 여기서 굴할 평냉 덕후들이 아니죠...
왠지 난관에 부딪힐수록 꼭 먹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기는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우리를 그런 눈으로 쳐다 보지 말아주세요)
이번엔 절대로 웨이팅에 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춰 곧장 캐치테이블에 들어가 수시로 대기 인원을 확인했습니다.
보고 하나는 참 잘하는 친구들…
꼭 범인 수색을 위해 잠복하며 사방을 주시하는 한 팀의 형사들이 된 것 같은 기분이네요.
퇴근을 하자마자 가게로 냅다 뛰었습니다.
조금 늦을 뻔했지만, 김태리 보법을 구사하는 제게 지각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열두시 반쯤 쭉쭉 빠져버린 대기 인원을 보고 잠깐 방심해버린 우리는 곧바로 뒤통수를 맞고 마는데요. 0명까지 줄어들었던 웨이팅이 1시를 기점으로 다시 40명대까지 치솟고 맙니다.
아니, 다들 뭐 먹이를 찾아 헤매는 물고기들처럼 떼로 이동하는 건가? 순식간에 증식한 사람 수에 놀라 급하게 대기 등록을 일단 때렸습니다. 이번만은 도착과 동시에 들어가는 산뜻한 입장을 바랐는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지각할 줄 알았던 제가 가장 빨리 도착하고, 곧이어 친구들이 하나둘씩 나타났습니다.
근데 만나자마자 배신감이 치밀어오르고 말았는데요.
평냉을 3개월 만에 먹으러 온 저랑 달리 이것들은 지난 주에도, 지난 달에도 몇 번씩이나 몰래 먹고 있었다네요... 난 오늘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혼자서들 먹으니 맛있더냐?
사실 저도 서령은 지난해 강화도에서 남대문으로 이전해온 직후 가오픈을 했을때 발 빠르게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여느 노포들과 달리 가게 분위기가 굉장히 정갈하고, 깔끔해서 고급스러운 느낌까지 있었는데요. 냉면의 맛 역시 개성보다는 깔끔하게 정석으로 승부하는 곳이라 느꼈습니다.
일 년 사이에 냉면 가격이 17,000원으로 오른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걸 뭐 어쩌겠나요..
못보던 새 친구들은 어느덧 서령 전문가가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막국수부터 제육까지 다 한 번씩 먹어봤다는 이야기에.. 원조 면스플레인 장인은 순식간에 입을 꾹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이젠 메뉴 결정을 줄곧 도맡아왔던 제 권한마저 다른 친구들에게로 위임할 때가 된 것 같네요..
어디 가서 함부로 명함도 못 내밀게 생겼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잘 시켜보거라)
친구 놈들이 요즘 좀 먹고 살만 한가 봅니다.
냉면 한 그릇으로는 성에 안 차는 건지 H는 겁도 없이 수육 반접시를 시키더군요.
덕분에 내 입은 호강을 하겠지만.. 요새 자꾸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네요.
그래도 일단 사주니까 즐겁게 먹어는 보겠습니다.
서령의 평양냉면.
뭐,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3개월 만에 들이킨 냉면 육수 한 모금에 감동의 물결이 차올라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매일 먹어도 분명 맛있을 테지만, 아마 그랬다면 이렇게 격한 기쁨을 느낄 수 없었겠지요..
인고의 기다림으로 지샜던 지난 시간들은 도파민의 극대화를 위한 의도적인 자기수련의 과정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나름대로 한 번 해봅니다.
혹시 맛 표현이 더 궁금하신가요?
죄송하지만 이 글은 맛집 리뷰가 아닙니다.
주구장창 냉면 얘기만 하고 있지만, 아무튼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이드, 수육 반 접시.
가격을 보니 마치 조연인데 출연료는 더 많이 받아가는 인기 배우 같습니다.
물론, 저한테 주연은 언제나 평양냉면 하나 뿐입니다.
(그래도 그 분들 없으면 영화나 드라마 못 만듭니다.)
때깔 보세요...
영롱합니다...
항정살 부위라 식감이 굉장히 부드럽고, 짭조름한 무생채랑 같이 먹으면 극락입니다.
정갈하게 고명을 쌓아올린 냉면에서 느꼈듯 서령은 투박한 맛이 있는 노포들과 달리 비주얼에도 신경을 많이 기울이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수육의 플레이팅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매번 두꺼운 삼겹수육만 먹어봤기 때문일까요..? 맵시 좋게 썰어놓은 항정수육을 밖에서 먹어본 게 처음이라 유독 시각적인 임팩트가 강했습니다.
맛집 리뷰 아니라면서 맛 표현 왜 하냐구요?
그냥 제 맘입니다.
(아무튼 이 영광을 수육 반 접시를 쾌척한 친구 H에게 돌립니다)
이 시리즈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냉면은 항상 거들 뿐입니다.
냉면에 곁들인 우리들의 대화가 항상 메인이니까요.
지난 번 모임에서 처음으로 결혼 얘기를 꺼내 우리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H의 연애사가 여전히 가장 뜨거운 이슈입니다. 화제성 순위를 따지자면 아마 냉면 바로 다음(?)에 자리하고 있을 겁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아닐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특별한 전개나 진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는 여전히 고민 중인 것 같지만... 그래도 뭔가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은 아닌 눈치였습니다.
온전히 제 재미를 위해 친구의 결혼식을 최대한 빨리 보고 싶었는데, 일단은 물 건너 간 것 같습니다. 친구한테 그래도 돼냐구요?
저흰 원래 이런 사이입니다.
장기연애를 이어오고 있는 두 친구에겐 별다른 근황이 없었습니다.
솔로로 지내고 있는 저야 뭐 황량한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라서… 당당히 친구들의 광대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방향에서 대화의 화살이 날아와 저를 당황하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넌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어떡할 거야?"
짧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한 질문이었습니다.
넌 비혼주의니까 결혼은 안할 테고, 그럼 노년에 챙겨줄 사람도 없을 텐데 장례나 유산 같은 건 어떻게 할 작정이냐... 뭐 이런 맥락의 궁금증이었을 겁니다. 물론 왜 이런 게 벌써부터 궁금할까 의아함이 들긴 했습니다. 아직은 살 날이 많다고 생각해서, 이렇게까지 먼 미래를 굳이 상상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막상 친구들을 따라 같이 고민을 해보니 생각이 꽤 깊어집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장례는 누가 치러주지?'
보통은 자식이 없을 경우 형제가 챙겨주기 마련이지만, 그 또한 저한테는 성립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노인이 됐을 땐 저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가족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친구들은 "그래도 동생이 챙겨주겠지"라며 애써 저를 다독였지만, 이건 두 사람이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저희는 그조차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거든요.
그래도 제겐 몇 없는 오랜 절친들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과연 나보다 오래 살아줄지는 모르지만...
다들 젊어서부터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저보다는 장수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내가 먼저 죽으면 내 장례는 너네가 해줘."
당장 죽을 병에 걸린 것도, 유언을 남겨야 하는 것도 아닌데 쓸데 없이 비장합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우정이 깨지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마 제가 말도 없이 잠수만 타지 않는다면 몇 십 년은 끄떡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근데... 장례는 그렇다 치고, 그럼 유산은 누가 갖는 거지?"
갑자기 친구들의 눈빛이 변합니다.
장차 고독사 할지도 모르는 친구의 장래를 조금이나마 안타깝게 생각했던 놈들은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재벌가 회장의 유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망나니 자식들만 남았습니다.
아, 물론 지금의 저는 땡전 한 푼 없습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물려줄 유산이 있을 것이라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상인 것 같긴 합니다. 수중에 빚이나 없으면 다행일 텐데 말이죠. 그래도 기왕 망상력을 총동원한 김에 현실적이고 비관적인 생각보다는 최대한 긍정적인 미래를 한번 그려보기로 합니다.
죽음을 앞둔 내게 적당한 유산이 남아 있다고 가정할 때, 과연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슬하에 자식도, 친밀한 가족도 없다면 친한 친구에게 유산 상속을 하는 게 가능한가? 상속법에 관해서는 문 외한이나 마찬가지이니, 일단은 챗지피티에게 도움을 구해봅니다.
오,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단, 공증된 유언장이 없다면 갑작스러운 사망에 이르렀을 시 친구는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다고 하니 미리미리 유언장을 써둘 필요는 있을 것 같네요. 있지도 않은 제 유산을 노리는 친구 놈들 덕분에 좋은 거 하나 알아갑니다.
하지만, 제게 친구가 딱 요녀석들만 있는 건 아닌데요.
그래서 과연 이들이 그 누구와의 경쟁도 없이 상속 서열 최우선순위를 차지할 수 있을지는 보장해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고 우리가 매달 정기 모임을 갖는 절친으로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이 말을 꺼내자마자 친구들이 암살 계획을 하기 시작합니다. 제 유산을 받아갈 만한 경쟁자를 하나씩 처단하겠다는 속셈인가 본데요. 제 친구들은 하나같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질을 가졌으니 서로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게 분명합니다.
…
다들 피카레스크물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네요.
물론 다 헛소리입니다.
제 친구들 그렇게 용감하지 않거든요.
“아니다, 유언장만 먼저 받아놓고 얘를 없애버려야 되나?”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라지만 당사자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곱게 죽어줄 제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 어디까지 할지 궁금하니 잠자코 들어봐 주기로 합니다.
급기야 친구 C는 나중에 저를 입양하겠다는 새로운 작전까지 꺼냅니다. 본인이 생일이 조금 더 빠르다는 이유로 이런 게 가능할 줄 아는가 봅니다.
미안한데, 저도 이 친구 밑으로 호적에 오르고 싶진 않습니다.
“에이, 뭘 남겨줄 생각을 하냐. 그냥 너 많이 써라. 혼자라도 잘 쓰고 살아야지.”
제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았던 녀석들이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합니다. 사실 이게 맞긴 합니다. 저는 얘들을 위해 유산을 남겨줄 생각이 1도 없으니까요. 오직 저만을 위해 살겠다고 비혼주의를 다짐했는데, 다 써보지도 못하고 떠나면 뭔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나면 아무 말 대잔치나 하나 헤어지는 게 저희 모임의 정체성이긴 하지만, 이렇게 한 가지 주제만을 가지고 헛소리가 꼬꼬무처럼 이어진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게 제 죽음에 관한 상상이었다는 게 더 어이가 없는 부분이지만요.
아직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모든 걸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넘길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면, 제가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외롭지 않게 혼자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제가 지금 한없이 어리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오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제가 죽게 될 때, 제 장례를 대신 치러주겠다고 하는 친구가 셋이나 있어서 든든합니다. 나중에 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겠지만, 먼 곳에서도 제 부고를 듣는다면 금방이라도 달려와서 제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말로는 유산을 노린다느니, 암살을 하겠다느니 하더라도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럴려면 일단 친구들이 저보다 오래 살아줘야 할텐데요.
다들 건강관리 잘해서 150살까지 장수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평냉집 방문기로 시작해 친구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결말로 이어지는 흐름이 과연 맞는 건가 싶은데요. 아무리 의식의 흐름 화법을 구사한다 해도, 이번엔 제가 봐도 좀 정도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갑자기 존대형 문장으로 바뀐 것도 이상하다 싶으실 텐데요. 아직 컨텐츠 운영 초기라 일단 실험 삼아 이것저것 해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엉망이라는 뜻입니다.
뭐 쓰다 보면 어떻게든 자리잡혀가겠죠. (머쓱)
앞으로도 평양냉면 더 자주 먹고, 더 의미없는 뻘소리로 돌아와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시켜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헛소리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