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동가, 논현동, 입 다물면 안되는 생일파티
2025년, 6월 28일, 이른 저녁
6월에도 어김없이 냉쫓사 정모가 돌아왔습니다.
달에 한 번 만나기로 한 것치고는 그동안의 모임 성사율이 썩 좋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이번 달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답니다.
6월은 무려 모임원의 절반인 두 명의 생일이 일주일 간격으로 연달아 붙어 있는 달이니까요.
그 주인공은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5월 모임에 불참했던 Y인데요.
TMI를 하나 말하자면, 우린 생일이 정확히 일주일 차이라 십 년이 넘도록 서로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사이랍니다. 저보다 일주일 생일이 빠른 Y가 일종의 생일 알람인 셈이죠.
생일을 까먹었다는 핑계를 절대 댈 수 없기 때문에, 놓쳤다가는 아주 큰일 납니다.
생일이 일주일 차이인데 깜빡했다? 어떤 변명을 늘어놔도 씨알도 안 먹힐 겁니다.
저의 적극적인 추진과 공지 덕에 생일 잔치(?) 겸 냉쫓사 정기 모임은 이번에도 무사히 성사됐습니다. 그런데 항상 주최를 도맡는 포지션이라서 그런가..? 종종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 나는 축하 받아야 하는 내 생일조차 셀프로 챙겨야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는 어린 시절부터 생일날마다 직접 친구들한테 만남을 요청해야만 겨우 생일의 구색이라도 맞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인간에게 당연히 축하받을 권리가 있는 건 아니기에 무작정 누군가가 챙겨주길 발나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딱 한 번쯤은 바라봐도 괜찮은 것 아닌가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지금 상태에 계속 머무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뭐, 늘 이렇게 살아왔어서 이젠 아무래도 좋습니다.
(진짜로?)
(헛소리는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지난 3년간 정말 많은 평양냉면집을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우리들에겐 미개척지들이 남아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살았는데, 내가 아직 못 먹어본 평양냉면이 한 트럭이라니 앞으로 몇 년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또 생겼습니다.
냉쫓사 6월 정모가 열린 곳은 학동역의 향동가입니다.
지난번 모임에 불참했던 Y가 기막힌 센스로 고른 곳이었는데요.
(신상 가게 찾아오면 센스쟁이로 쳐줍니다.)
비교적 최근에 오픈한 곳이라 평냉의 핫스팟인 강남에 위치해 있음에도 여태 가보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평양냉면의 인기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탓일까요? 서울에 절대 강호들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음에도 신생 주자들이 하나둘씩 계속 등장하는 것 같다는 걸 요새 계속 느낍니다. 뭐, 덕분에 우린 뚫어야 할 맛집들이 더 많아졌으니, 좋기야 하지만요.
그런데, 왜 냉쫓사 멤버들을 제외한 제 지인, 직장 동료, 가족들은 모두 하나같이 평양냉면의 맛을 모르는 걸까요? 이 세상의 더 많은 사람들이 평냉의 진가를 깨우칠 수 있도록 평양냉면 전도사를 제2의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댁들이 같이 먹어줘야 제가 곁들임 요리를 하나라도 시킬 수 있으니까요.)
무더웠던 6월의 마지막 토요일.
밖에 나가는 것조차 싫지만, 이럴 때만큼 평양냉면을 먹기 적합한 타이밍도 없습니다.
사실 이 맛에 여름을 맞는 거지요.
평냉을 먹는 날이면 아무리 먼 곳에 가더라도 다들 군말 없이 나옵니다. 한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지각쟁이였던 녀석들도 있는데, 요즘엔 도통 늦는 법이 없는데요. 이게 바로 평양냉면의 선한 영향력인가 싶기도 합니다. (만물 평양냉면설)
한여름의 평양냉면은 길고 긴 웨이팅이 예상되기 마련이지만, 이날 향동가의 앞은 꽤 여유로웠습니다. 최근 올라왔던 안성재 셰프의 유튜브 콘텐츠가 방문 난이도를 극악으로 만들었을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그 여파가 세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한 달 사이에 각자 근황에도 굵직한 변화들이 생겼습니다.
저는 얼마 전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고, C도 오랜 준비 끝에 공기업에 합격해 입사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제 한 명도 빠짐없이 수입원이 생긴 덕인지 전보다는 한결 여유가 느껴졌는데요.
물론, 제 환경 변화가 가장 크다보니 그저 저만의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게의 명성과는 별개로 처음 찾은 가게에서 맛보는 평양냉면이란 언제나 설레는 존재입니다. 물론 한 입을 먹는 순간, 순식간에 머릿속에 있는 평냉 폴더를 꺼내 데이터를 분석하고, 비교군을 형성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기분은 꽤 짜릿하답니다. (미친 놈 같나요?ㅎ)
향동가의 평양냉면은 때깔부터 영롱했습니다. 고급져 보이는 놋그릇에 차곡차곡 고명들이 쌓아올려진 정갈한 모습... 눈으로만 봐도 약간의 허기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평양냉면을 정말 애정하지만,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먹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처음 먹을 때의 설렘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집단지성은 생각보다 더 냉철했습니다. 다들 마니아답게 육수부터 한 술 뜨고 감상을 꺼내놓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강한 인상을 느끼진 못했다는 듯 리액션이 어딘가 시원찮았는데요. 물론, 입 따로 마음 따로라 잘 먹기는 했다만, 서울엔 더 맛있는 평냉집들이 훨씬 많지 않나 싶었습니다.
신생 냉면집이라 가게도 깨끗하고, 식기나 테이블 같은 가구들도 뭔가 고급스러웠는데요. 과연 맛의 퀄리티도 그 정도일지 기대감을 높여봤지만, 생각보단 평범했습니다. 누군가 여길 두고 강남의 서령이라고 했다던데.. 저는 잘 모르겠네요.
간간하지 않은 평양냉면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메밀향이라던가 육수의 깊이라던가 두드러지는 특색이 하나쯤은 있어야 매력적인 냉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뭐, 나름 철학 나부랭이가 있는 척을 해봅니다.) 향동가의 냉면은 모든 요소의 조화가 깔끔했지만, 그래서 더욱 무난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요즘은 평양냉면의 맛이 상향평준화 되어가는 중이고, 최근 개성파 냉면에 좀 더 끌리고 있다보니 향동가에선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의외로 만두는 꽤 만족스러웠는데요.
메밀을 섞어 만든 만두피의 쫄깃함과 아삭한 식감과 담백한 풍미가 느껴지는 만두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졌고, 손만두다운 투박함이 있어 냉면보다 인상적이었습니다. 분점인 한남점과는 퀄리티 차이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논현점에서는 만두를 곁들임 메뉴로 주문해 보는 걸 한 번 추천해 봅니다.
요즘은 생일파티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유병재의 ‘웃으면 안되는 생일파티’가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생일파티에 대한 추억이 없는 탓일까요? 독특한 콘셉트로 생일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왠지 모르게 자꾸 시선이 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생일파티는 참으로 평범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 누가 생일이란 말을 붙여주지 않는다면, 과연 생일 모임이 맞긴 한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같이 모여 냉면을 먹고, 카페에서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전부이니까요.
그런데 집에 돌아가 하루를 곰곰이 되짚어보니 우리들에게도 나름의 콘셉트가 있었습니다. 흠... 이름을 붙여보자면, <입 다물면 안 되는 생일파티>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영상으로 증거 자료를 남겨오지 못하는 게 매번 아쉽지만, 우린 정말 말이 많습니다. 친구들을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때부터 느껴왔던 사실인데,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들 여전합니다. 나름 나이를 먹긴 했답시고 텐션은 그때보다 낮아지긴 했지만, 말수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다들 평소에 어떻게 참고 사는 걸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근데 다시 한번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마냥 웃어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마치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산 사람처럼 떠들어재낀다는 건 곧 평소에 원하는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의미이지 않을까요?
사실 저만해도 그렇습니다.
평범한 일주일의 루틴을 살펴보면, 출퇴근을 하는 평일 내내 사무적인 대화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집에서 쉬다 보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곧 주말입니다. 애당초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별 문제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면, 매일매일을 이런 식으로 지내다가는 버텨내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제가 바로 그렇거든요.
아마 친구들도 저처럼 평상시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가 생각보다 없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는 건 언제나 나의 위치나 평판을 고려한 필터링을 요구하고, 감정 표현에도 충실할 수 없으니 말을 뱉더라도 늘 속 시원한 구석이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끼리라면 주중 내내 유지했던 가면을 잠시 벗어던지고, 생각 없이 아무런 말이나 막 뱉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적어도 서로에 대한 어떠한 오해도, 평가도 하지 않는 사이니까요. (물론, 저희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을 할 정도로 개념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표현이 조금 거칠 뿐이라고 해두죠.)
대신 남의 말을 차분하게 경청해준다? 이런 건 기대하면 안 됩니다.
솔직히 서로의 말은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저 각자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쁠 뿐이지요.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그저 친구의 얘기나 내내 듣다가 집에 돌아오기 일쑤인데요.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려면, 정신을 바짝 잡고 빈틈을 파고들 준비를 항상 해야 한답니다.
마치 떼토크쇼에서 멘트 타이밍을 노리는 맨 뒷 줄 코미디언의 포지션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요..?
저희 중에 가장 심각한 다말증 환자를 꼽자면 단연 C일 겁니다.
C는 네 사람 중 가장 웃음 타율이 압도적이고, 개그맨이 됐어야 할 놈이 진로를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드립력과 개그감이 월등히 높은데요. 문제는, 별의별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다한다는 겁니다. 십 수 년전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의 기행이라던가, 혹은 본인만 알고 있는 당시 어느 선생님의 성대모사라던가, 내가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은 각종 TMI를 방출하는데, 어찌나 기억력이 좋은지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에피소드를 가져오곤 합니다.
솔직히 재미는 인정하니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들어줄 수는 있지만...
이날따라 유독 C의 텐션은 높고, 저와 Y는 점점 기가 빨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참다 못한 저는 속으로만 되뇌고 있던 말을 입밖으로 꺼내고 말았습니다.
야, 그만 말해.
겨우 수다를 잠재우는 데 성공한 저희는 이 틈을 타 자리를 정리하기로 맘 먹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카페에는 저희 말고 다른 손님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짐작일 뿐이지만, 저희가 너무 소란스러웠던 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을 해봅니다.
C의 그런 점은 참으로 못 말리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집에 가는 방향이 저와 같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내내 저의 진지한 딥토크를 고분고분 들어준다는 점에선 좋은 친구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1:1 대화에 강한 체질을 갖고 있다 보니 상대와 단 둘이 있을 때 철학적인 대화나 인생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다소 재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C는 군말없이 들어주고, 항상 맞장구도 잘 쳐줍니다. 이러니 어찌 이 친구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이번 모임에서 느낀 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얘기가 하고 싶어 안달 나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약속을 잡을 때, 점심에 만나서 토크 장소만 1차-2차로 구성해야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요. 저만 답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가 들면서도, 고등학교 시절 무서울 것 하나 없이 날아다니던 친구들에게 어느덧 사회생활이라는 억제기가 생겼다는 걸 느끼고 나니 이내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다들 나이가 들어도, 서로 함께할 때 만큼은 영락 없는 바보 같았던 그 시절의 철없음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조금 깊어졌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 글을 쓰다 보니
6월 냉쫓사 후기는 좀 심하게 횡설수설했던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봐주시는 분들이 꽤 있어서 의식의 흐름대로 휘갈기는 글임에도 약간 부담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도 저희들의 뻘소리를 들어주셔서 감사하고, 7월의 냉쫓사는 잠시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개인 콘텐츠로 찾아뵐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