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우박 돌풍을 뚫고 가는 아가씨와의 만남
어제오늘 제주에는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제주에 부는 돌풍은 웬만한 다른 도시의 태풍에 맞먹습니다. 어른이 서 있기에도 만만치 않은 돌풍에 자주 가는 해안가 카페의 통창이 흔들거렸습니다. 앞 집 사는 친구를 불러 비디오 게임을 하는 아이들을 집에 두고 카페에 데이트 나왔던 남편과 제가 날씨가 더 악화되기 전에 서둘러 집을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해안 도로 한가운데에 우박 돌풍 속에서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한 아가씨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이쿠, 저 아가씨 이 날씨에 왜 여기에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거야... 깜짝 놀란 남편과 제가 홀린 듯이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습니다.
"어디 가세요? 도움 필요하세요?"
"아, 공항 가는데 택시가 안 잡혀서..."
"타실래요? 저랑 남편만 차에 있어요. 공항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만 좀 데려다주실래요?"
양손 가득 짐을 트렁크에 싣고 아가씨를 태우는데 아가씨의 옷과 헝클어진 머리가 온통 젖어 있습니다. 혼자 얼마나 걸은 건지 안쓰러웠습니다. 남편이 아가씨를 안심시키려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데당찬 아가씨는 이 상황이 불안해 보이는 기색은 없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혼자 제주도에 여행을 왔다가 렌터카를 반납했는데 셔틀 운행 시간이 지나서 공항에 갈 방법이 없었답니다. 날씨 탓인지 아무리 택시를 불러도 오지 않아서 버스를 타려고 렌터카 반납 장소부터 이미 꽤 먼 거리를 이 우박 돌풍을 뚫고 걸어오던 차였습니다.
우박 돌풍을 뚫고 온 아가씨치고는 너무 해맑고 당차고 심지어 여유있는 모습입니다. 친숙한 부산 사투리에 바로 정이 갔습니다. 험악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알차게도 다녔던 듯싶습니다. 트렁크에 짐을 넣을 때 보니 우진 해장국, 우무 푸딩, 우도 땅콩 초콜릿 등 웬만한 맛집 탐방과 동문시장쇼핑도 꼼꼼하게 하고 가는 길인 것 같았습니다.
날씨 탓인지 비행기가 연착되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는 아가씨의 말에 아차... 비행기가 안 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도착 정보를 찾아봤습니다. 대한항공 남은 두 편의 비행기 중 하나는 결항이고 다른 하나는 지연입니다. 아가씨의 비행기는 수속 중이며 지연될 예정이었습니다. 제주 날씨의 변덕과 결항 사태의 혼란스러움을 잘 알기에 혹시 결항될 때를 대비해서 공항에서 내리기 전 제 전화번호를 주는데 아가씨가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덥석 제 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했습니다.
아가씨에게서 그날 밤 무사히 제주도를 탈출해서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다음날 같은 번호로 정성스럽게 긴 감사 문자와 하트를 동반한 커피 쿠폰도 도착했습니다. 손사래 치기를 멈추고 제 번호를 덥석 받은 이유가 짐작됩니다.
짧았지만 강렬한 만남입니다. 예전 <명상 수련 가는 길>에 만났던, 마운트 마돈나의 산길에서 나에게 차를 태워 주셨던 할아버지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나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할아버지가 바라보셨을 당시의 해맑고 당차고 여유있었을 내 모습이 상상되어 재미납니다. 할아버지의 시선에서 본 그 모습에 미소 지어집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리가 돌고 돌아 이렇게 만나게 됩니다.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마음을 제가 아가씨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나와 아가씨가 이어집니다. 마음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