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주 Oct 22. 2020

흑백의 현실에 색깔을 부여하기-『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창비)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의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새롭다’이다. 작품의 분위기, 제목과 표지 그림 모두 신선하다. 심오한 내면세계나 불행하고 어두운 한국소설에 익숙해 있던, ‘옛날 사람’인 내게 이 소설집은 처음 먹어본 이국의 음식 같았다. 특별히 불운하거나 특별히 좌충우돌하는 인물 없이 지극히 평범한 ‘요즘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에세이가 아닌 소설의 옷을 입고도 어색하지 않다. 편안하고 친숙한 이야기들 속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이 있다. 대한민국 평범한 직장인들의 일상을 그린 이 시대의 자화상 같은 소설집이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들은 모두 글쓴이가 회사에 다니는 동안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소설들을 쓸 당시, 작가는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회사를 다니며 ‘일의 기쁨과 슬픔’을 몸소 체험하던 직장인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다. 간접 경험이 아닌 직접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삶의 체험 현장’이기에, 이토록 날 것의 살아 숨쉬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어디선가 읽었던 ‘현실세계는 본래 흑백이다. 현실에 색깔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고 예찬이다.’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이 소설집에 딱 맞는 이야기인 듯하다. 흑백에 가까운 일상에 색깔을 부여하는 글쓴이의 시선이, 이토록 평범한 듯 신선한 소설을 탄생시켰다. 뛰어난 작가는 무엇을 경험했느냐보다 경험에 어떤 의미와 색깔을 부여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닐까.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겪어봤음 직한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     

 


첫 번째 수록 소설 「잘 살겠습니다」에는 청첩장을 돌리고, 축의금을 주고받고 결혼을 준비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결혼문화와 직장내 성차별, 그로 인한 연봉차이 등 현실의 소소한 생각거리들이 가득하다. 또한 눈치 없는 입사 동기 빛나 언니와 똑 부러지는 성격의 ‘나’의 인물 묘사가 공감되고 재미있었다.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앱서비스 ‘우동마켓’ 개발자인 안나를 통해 판교 스타트업회사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모방한 스크럼을 훈화 말씀 마냥 40분 넘게 한다거나, 수평적 기업문화를 위해 직함 대신 영어 이름으로 부르지만, 전혀 수평적이지 않은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은, ‘우동마켓’에 판매글을 도배하는 ‘거북이알’의 이야기다. 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는 그녀는, 포인트를 현금으로 전환하기 위해 ‘우동마켓’을 이용한다.      


 “원래 내가 받았어야 하는 건 포인트가 아니라 돈인데…… 사실 돈이 뭐 별건가요? 돈도 결국 이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의 포인트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죠.” / “어떻게요?” / “포인트를 다시 돈으로 바꾸면 되는 거잖아.” (p.52)     

 

말도 안 되는 갑질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꿋꿋하게 살 길을 찾는다. 참담함에 함몰되지 않는 그녀가 유쾌하면서도 슬프다.      


 “나는 다시 엔씨소프트 사옥을 바라봤다. 거대한 건물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옆으로 길쭉한 ‘ㅁ’자 같은 모양새였다. 그 사이로 한낮의 쨍한 하늘이 보였다. 사원증을 걸고 커피를 들고 돌아다니다보면 누구나 한번씩 올려다보게 되는 네모난 하늘이었다. 나는 액자 틀을 두른 것 같은 네모반듯한 하늘을 볼 때마다 그 속으로 무언가가 통과해 지나가는 상상을 했다. 용, 새떼, 열기구, 헬리콥터.” (p.56)     

 

안나가 올려다보는 네모난 하늘은 그녀가 매여 있는 조직, 회사일 것이다. 액자틀처럼 견고한 틀 속에 갇혀 있지만, 답답한 그 안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상상해내는 ‘용, 새떼, 열기구, 헬리콥터’ 들 때문일 것이다. 사는 게 녹록지 않지만 월급날 때문에 견디고, 스트레스가 짓누르지만 공연티켓과 항공권을 예매하며 보상받는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인의 비애와 소소한 일상이 절대 소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먹고 사는 일은 그 비루함을 견디는 힘만으로도 위대하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은 「탐페레 공항」이다. 다큐멘터리 PD를 꿈꾸는 ‘나’는 모자라는 스펙을 쌓기 위해 더블린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경유지인 핀란드 탐페레 공항에서 앞을 못 보는 노인을 만났고, 이후 노인은 자신을 도와준 ‘나’에게 사진과 편지를 보낸다. ‘나’는 기말고사와 취업 준비 등 현실의 과제들에 치여 노인에게 답장을 하지 못하고 육 년의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 ‘나’는 다큐멘터리 PD의 꿈을 접고 식품회사에 다닌다.      

 

어느 날 방송국 PD 공채시험 지원서를 쓰다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이유를 쓰시오.’ 문항에서 육 년 전 노인을 떠올린다. 노인의 오로라 엽서와 편지를 보고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는다. 그 눈물 속에는 노인에 대한 미안함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오랜 꿈과 젊은 날의 희망들, 지나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눈물로 쏟아졌을 것이다.


그녀가 쏟은 눈물을 떠올리니 내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생계와 현실의 안락함을 택한 대신 떠나보낸 내 젊은 날의 꿈들이 회한이 되어 흐른다. 이 소설은, 삶에 치여 허덕이다 문득 무언가 잊고 있다고 느껴질 때, 순수했던 지난 날이 아련하게 떠오를 때, 그럴 때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탐페레 공항」의 ‘나’가 식품회사에 다니면서도 다큐멘터리 피디에의 꿈을 접지 못한 것처럼, 장류진 작가도 소설을 향한 꿈을 오래도록 지닌 채 회사에 다녔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을 쓰는 일, 그건 내 오래고 오랜 비밀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늘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네가 무슨 소설을 써? 소설 쓰고 있네…’라고 속삭이며 하하 웃곤 했는데 그건 슬프게도 나였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꼭꼭 숨겨왔다.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도, 내게는 너무도 중요한 나의 일부를 이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 내가 자초한 일이면서도— 한없이 외로웠다. (p.233)     

 

한없이 외로웠던 시간들을 지나온 그녀의 소설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십 년의 직장 생활은 그녀의 작품 세계의 재료와 바탕이 되어준 고귀한 시간이었을 게다. 어쩌면 이 소설집은 취업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고, 부대끼며 통과해온 그녀 삶에 따라온 보상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흑백의 현실에 색을 입히는 그녀만의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보상이다. ‘인생이란 내디딘 걸음만큼만 딱 내 몫’이라고 한다. 그녀가 내디딘 걸음처럼 나도 내 몫의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만의 유쾌하고 아름다운 추모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