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삶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 자신을 매달고 가는 비합리를 목격한다. 서른이 되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기증 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어느 날 돌연 자신에게 ‘지금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나는 이 일을 왜 하고 있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거지?’, ‘나는 누구지?’라고 묻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낯선 저 삶의 양면성에 당황해하며 침묵 이외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된다. 육체가 요구하는 부름에도, 정신이 요구하는 부름에도 설득력 있는 대답으로 응수하지 못한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자신에 대해 침묵하는 존재인 것이다!
삶을 독립적으로 의식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에게 삶의 방향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계’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그 메울 수 없는 틈을 채우려 노력해보아야 헛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부조리와 모순뿐이며,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침식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자고 그토록 수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단 말인가? 문명인의 삶, 현대인의 삶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이 언어의 그물망에 낚이지 않은 삶이란 어떤 삶일 것인가? 이보다 괴로운 삶일까? 더 슬프고 고된 삶일까? 가엽고 비천하고 동정받아 마땅한 삶일까? 정녕 수조에 갇힌 물고기를 가엽게 여기는 더 큰 수조에 갇힌 자들이야말로 이 세계를 참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란 말인가?
그러나 형이상학적 질문들 끝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고작 모순이며,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은 정신착란에 가까운 현기증이다. 역사상 가장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대사회의 아이러니함에, 문명의 탄생 이래 가장 많은 자유 국가의 사람들이 세계 밖으로 도피하는 자살의 상징성에,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삶 자체를 저당 잡혀야 하는 저 소름 끼치는 역설에 우리는 지쳐버리고만 것이다!
주체성이 결여되어버린 생을 그저 목도할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떤 만남을 바란다는 것, 단순함에서 복잡함에 이르는 하나의 만남을 원한다는 것은 물질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염세주의처럼 또 하나의 필연적인 반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익명의 대도시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른이 된 사람은 흔히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찾는다. 사회적으로 명예롭기 때문에, 안정된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경제적 배경이 뛰어나기 때문에, …….
‘무엇보다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잘 사는 것보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스며든 우스꽝스러운 명제이다. 그러나 잔인한 명제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가치의 전도를 이끌어 내었단 말인가? 삶의 진실된 측면보다 삶의 허상을 쫓는 일이 어떻게 가능해졌단 말인가? 그 기원에 대해 나는 할 말이 많으나 여기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누군가를 연인으로 받아들이는데 까지는 여러 가지 동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정신과 육체,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될 만한 덕목들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정직함과 도덕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을 움직이는 발단이 된다. 아, 이성, 인류를 오늘날까지 데려온 저 장본인은—문명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자신들의 흔적을 역사라는 도화지 위에 남기기 위해, 수많은 아군들을 이용하고 더 많은 적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이 땅에 흩뿌렸던가! 또 그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지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자기모순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성을 옹호하고 이성의 가치를 중요시 하지만, ‘현실’로 비유되는 이 세계, 철저하게 ‘이성’으로 작동하는 이 세계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우리의 감정을 극한으로 고조시키는 저 부정부패 또한 그 뿌리에는 이성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제아무리 호소해 보아야 되돌아오는 건 냉소적인 자동 응답뿐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그토록 사랑에 열광하고 집착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이 세계로부터 자신을 떼어 놓고자 하는 능동적인 욕망을 포함한다. 나는 숱한 사람들이 혼외 관계, 즉 불륜을 일삼는 이유도 아마 대부분 여기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를 살게 하는 저 모든 감정들(행복, 희망, 열정, 정념, 명랑함, ……)도 없음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끼는 일에 이성 따위는 고개를 들이밀 틈조차 내어주지 않는 것, 절제와 진지함 대신 순응과 명랑함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행운이라면 행운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행운이 필요한 것이다! 적극적인 이성의 요구가 억제되는 순간, 의식의 눈을 때때로 감는 순간, 현기증 나는 사고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신체 기관의 반사작용, 오롯이 이 순간에만 몰두할 수 있음을, 살아 있음을, 숨 쉴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행운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본연의 감각들을 사랑을 함으로써, 이성을 만남으로써,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낭만주의자가 됨으로써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으로 미루어보아—사랑을 하지 않고서도 세계의 부조리와 삶의 고통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사랑에 속하지 않은 다른 세계, 즉 스스로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또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은 감정의 원천이다. 감정은 기분에서 비롯된다. 기분은 지체하지 않으며 매복해 있다가 느닷없이 기습해 온다. 어떤 사람을 한동안 지켜본 결과, 그 사람을 사랑하기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사고와 판단보다 생존과 순간적인 기분에 더 진실하게 반응하는—너무나 인간적인 본능을 감지할 수 있다. 이 본래적인 습관의 유래에 관해 과학적 증명이나 생물학적 근거는 필요도 없다. 우리는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생(生)’의 기분을 사랑의 영역에서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의 낭만적 성향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축복을 맛보기 위해, 저 가면과 위선의 관계들로부터 멀어져 오직 둘 만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무의식적 본능은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사랑에 있어서 낭만주의를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비난하는 일부 정신의학자와 심리상담가, 그리고 오직 ‘대화의 중요성’과 ‘성숙함’ 만을 강조하는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자신의 삶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어리숙한 낭만주의자가 되는 모순을 여럿 보았다—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일부 어리석은 종교 지도자를 포함하여, 이 시대를 장악한 저 알고리즘의 세계에서는 자발적 설교자들이 넘쳐흐른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모순에 놀라기는커녕 심지어 피식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자가당착은 기가 찰 노릇이다(이는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 각오로 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하라”라고 요구하는 저 중재자들의 주장 또한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가 말한 바, ‘우리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임을 부정할 수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저 무책임한 요구는 그 자체로부터 모순을 분비한다. 스스로를 사랑하려는 은밀한 시도는, 도리어 그 사랑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으로 몰고갈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을 소유하려다가 그 사랑에 자신을 소유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자신에 대한 종속관계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장담하건대 저 설교자들은—인간이라는 동물에 관하여 인류의 삶을 고찰해본 적도 없고, 인류가 언제부터 삶을 ‘고통’으로 느껴왔는지에 대한 인간 심리의 뿌리 깊은 역사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원시 인류의 능동성이 어떻게 하여 수동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는지 생각이나 해보았겠는가? 하물며 중세시대를 망라했던 동서양의 귀족 사회가 ‘사랑’을 지칭하는 언어의 어원조차 자기들의 입맛대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해보았겠는가? 그러한 질문들의 가치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깊이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지극히 일반적이고 표면적이며, 현대적인 경험들 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사랑은 이러이러한 것이라며, 마치 그것이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오늘날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숙한 태도와 대화—이 부분은 아직까지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지만—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는 사실들에 대한 고찰, 즉 성숙함과 대화의 가치를 따져보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가치들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사랑 또한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단순히 남녀가 만날 때 느끼는 감정의 피상적인 범주에 속해 있지 않다. 실제로는 표면보다 더 깊숙한 심연 속에 인간 심리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