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영상과 한몸이 되다
쉽게 보는 영상에는 이유가 있다
가독성(可讀性)은 얼마나 쉽게 읽을 수 있는지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보통 책이나 문서를 소개할 때 많이 쓰이는 단어이며 출판사 에디터들에게 '가독성'이란, 책을 만들면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술술 읽혀요'라고 말하는, 잘 읽히는 책에는 대부분 가독성을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 있다.
영상에서도 마찬가지다.(여기서 영상이란 교육/강의/자기 계발 류를 말한다) 어렵거나 복잡한 내용도 쏙쏙 이해되는 영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래도 1. 콘텐츠와 2. 화자의 전달력이다. 전하고자 하는 가치가 명확한 콘텐츠는 이미 그 자체로 90% 완성이다. 거기에 전달하는 화자의 발음이 정확하면 훨씬 이해가 쉬워지고 심지어 강약 조절이 가능한 톤을 구사할 수 있다면 솔직히, 컷편집만으로도 충분하다. 유명한 연사들의 유튜브 - 김미경 TV, 밀라논나, 조승연의 탐구생활 등 - 를 보면 가치 있는 콘텐츠가 준비된 화자를 통해 영상에 담길 때, 그 콘텐츠의 전달력이 얼마나 파워풀해지는지 알 수 있다.(심지어 편집까지.. 말해 뭐해...)
하지만 몇몇 조건은 부족해도 성공한 채널이 요즘은 더 많다. 유튜브 특성상 모두에게 열려있는 플랫폼인 만큼 대부분 부족한 환경에서 영상을 만들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구독자수가 유독 많은 채널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독특한 콘텐츠로 승부하는 경우, 화자가 가진 매력이 남다른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편집이 영상과 소위 '찰떡'인 경우다.
나는 편집의 고수는 아니다. 오히려 아직 갈 길이 먼 평범한 편집자다. 그래도 딱 하나 내가 잘한다고 자부하는 게 있는데, 바로 영상의 자막이다. 그 영역에 있어서는 '찰떡' 편집이 가능하다고 클라이언트들에게 자신 있게 말한다.
지금은 넷플릭스, 쿠팡 플레이, 디즈니 플러스 등 훌륭한 자막을 제공하는 플랫폼 덕분에 보고 싶은 영화를 손쉽게 볼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불법 다운로드'가 판을 쳤고, 자막 역시 '어둠의 경로'로 다운로드하여 영상에 합쳐서 보던 시절이 있었다.(... 전 국민이 불법 다운로드하던 그 시절;;;;)
그때를 돌이켜보면, 영상과 자막이 약간이라도 어긋난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너무 피곤했다. 특히 액션과 판타지를 좋아하는 나는, 전환도 빠르고 급박하게 흘러가는 장면에서 자막이 늦어지거나 빨라져서 엉키기 시작하면 그대로 영화를 꺼버리기 일쑤였다. '자막'의 퀄리티는 말할 것도 없다. 생각 없이(?) 직역된 자막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1등 공신이기 때문에 아마추어 번역가여도 실력이 좋은 경우, '누구누구의 자막'이라고 하면 '믿고 본다'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제는 자막 없이 영상 보는 게 힘들다?
요즘에는 한국어로 된 영상에도 한국어 자막이 거의 필수라고 느껴진다. 예전에는 그냥 보던 영상을, 요즘은 각자 취향과 목적에 따라 보는 방법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에 익숙해진 세대라 그런지,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지루하게 느끼기도 하고 텍스트가 보조해주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 것도 맞다.
영상을 보는 속도 역시 개인차가 크다. 누군가는 1.0배속이 너무 느려서 1.5배속을 기본 속도로 설정해두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그보다 더 빨리 영상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더더욱 소리만으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또 아예 소리를 끈 채 자막만으로 영상을 보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도 출-퇴근길을 포함한 자투리 시간에 잠깐 영상을 볼 때면 소리 없이 자막 위주로 보는 경우가 꽤 많았다.(애 재우고 나서도 그러하다.. 허허..)
이렇게 개인이 영상을 보는 상황이나 방식의 차이가 앞으로 점점 더 디테일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막'은 영상에서 이제 필수 요소임은 물론이고 점점 더 영상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요소로 부상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자막으로 가독성 챙기는 2가지 방법
이런 이유로 편집 시, 영상의 가독성을 높일 수 있는 '자막'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들리는 사운드를 텍스트로 전환해서 입력해주는 것 이외에 자막 작업에 공을 조금 더 들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공들일 때 자막이 가진 은밀한 힘이 무섭게 치고 나오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2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 번째로 자막을 잘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자막은 '말자막'을 의미한다. '포인트 자막'이야 어차피 포인트로 치는 것이기 때문에 짧고 굵은 키워드를 잘 뽑아내야 한다는 걸 모두가 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말자막'의 경우, 화자가 말하는 그대로를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막만 보면, 했던 말을 지나치게 반복하거나 문장이 끝나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같은 한국말이어도 말할 때 쓰는 어법과 문장을 구성할 때 쓰는 어법에는 차이가 있으며 게다가 사람마다 다른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막을 통해 영상의 퀄리티를 높이고자 한다면, 화자의 구어체를 가능한 매끄러운 문어체로 정리하여 자막에 올리는 것을 추천한다. 또 화자가 말하면서 생략하는 주어나 목적어가 있다면, 혹은 말 끝을 흐려서 동사가 생략된 경우라면 자막에 표시하여 보는 사람의 이해를 돕는 것도 좋다. 사운드를 들으면서 자막을 봐도, 빠르게 재생하면서 자막을 봐도, 심지어 사운드가 없이 자막만 봐도 완벽하게 영상의 내용이 전달될 수 있게 말이다.
두 번째는 자막이 등장하는 '타이밍'이다. 이건 작업하면서 생기는 감각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사실 설명만으로 전달하기 좀 어렵다. 하지만 내가 작업했던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화자가 말을 시작하려고 호흡을 내뱉는 '직후'에 자막이 등장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여기서 '직후'를 초단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영상에서 1초는 무척 긴 시간이다. 일반적인 영상은 보통 1초에 30 프레임인 경우가 많은데, 화자가 호흡을 뱉기 시작하고 1 프레임에서 최대 3 프레임 후에 자막이 등장할 때 그 효과가 제대로 나온다. 딱 어디라고 하기엔 화자의 말 속도나 습관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지만 보통 화자의 호흡이 시작되기 '직전'보다 '직후'에 자막이 등장하면 화자의 말에 더욱 집중이 잘 된다.
내가 처음 자막 작업을 할 때, 프리미어 오디오 타임라인을 기준으로 자막 작업을 했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니 아주 미묘하게 소리보다 자막이 먼저 치고 나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본능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타임라인 상에서 웨이브로 보이는 오디오의 시작 시점과 실제로 귀로 듣게 되는 시점 사이에 오차가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그때는 꼼수 부릴 요령도, 실력도 안됐을 때라 다 자리 잡은 자막을 하나씩 하나씩 내가 원하는 위치로 다시 옮기는 삽질(?)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삽질하다 보니 '여기가 자막 시작이다!' 하는 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화자의 말투와 속도에 익숙해지고 나면, 딱히 타임라인을 챙기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자막을 끊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어려운 작업도, 특별한 작업도 아니다. 하지만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면 놓칠 수밖에 없는, 편집자의 섬세한 '일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내가 만드는 영상이 보는 사람에게 조금 더 와닿고 쉽게 이해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초에 편집이라는 것의 본질이 그것이니깐. 어렵지 않은 작은 '일감각'부터 익숙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자막의 타이밍에 대한 감을 익혀보는 것을 추천한다.
쉽지만 그 효과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