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읽게”하다
영상인데... 가독성이라고?
나도 안다. 가독성이란 단어가 영상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지.
예전에 일본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개운하게 샤워한 후 호텔방 TV를 켰는데 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야해서가 아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색색의 두껍고 정신없는 폰트들이 이리저리 들어왔다 나왔다, 눈알을 핑핑 돌게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일본어를 몰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를 여행하면서 봤던 TV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진 않았다. 이건 분명, 일본 특유의 감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봤다. 일본의 자막이,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이 이토록 화려(?)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찾아보니 일본 예능 자막의 기원이 일본 만화, 즉 ‘망가(漫畵)’의 풍선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어로 ‘만화’를 ‘망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 만화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될 정도로 일본 만화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다. 망가는 불과 7-8년 전 만해도 미국 만화와 함께 세계에서 거대한 시장이었으며 2021년 기준으로 미국의 그래픽 노블 판매 순위의 1위부터 20위까지가 전부 일본 만화일 정도로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
지금은 영화 콘텐츠로 더 많이 접하는, 디즈니 만화나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미국식 만화가 20세기 중반까지 주류였으나 20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망가가 새로운 문화 형식으로 글로벌한 유행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일본 만화의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일까. 이유가 궁금해지던 찰나, 내가 봤던 서양 만화책과 일본 만화책을 봤을 때 느낌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며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미국 만화책은 대체로 텍스트가 많은 편이다. 텍스트가 이끌고 그림이 보조하는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읽어야만 하는 텍스트가 대부분이다. 에디터 시절을 떠올려 봐도, 재미있다고 판권 검토 요청이 들어온 미국 만화책 중에서 내가 쉽게 읽어낸 만화책은 몇 개 없었던 것 같다. 텍스트를 읽기 싫어하고 최대한 공부 안 하면서 실력은 늘리고 싶은 양아치(?) 학습자였던 내 기준에서, 서양식 만화는 익숙하지 않은 대문자 텍스트가 꽉꽉 차있었기 때문에 항상 최종 선택에서 제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일본 만화책은 반대의 느낌이 강하다. 컷 그림이 주도적으로 내용을 끌고 간다. 컷의 크기도 자유롭게 변형되며 텍스트는 컷을 보조하는 역할이다. 아니, 텍스트도 하나의 그림으로 보는 게 맞겠다. 그래서 텍스트와 컷 그림이 구분되지 않고 한 컷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러니 얼마나 자극적인가. 텍스트조차 나의 모든 오감을 건드려 스토리를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일본 '예능' 자막의 시작이 일본 만화라니... 자막이 왜 그 모양(?)이었는지, 단번에 이해됐다. 내 개인 취향은 아니지만, 그 엄청난 존재감의 자막 덕분에 살아서 팔딱거리는 활어만큼이나 영상이 파워풀 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예능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무한도전>과 <신서유기>가 생각난다. PD 특유의 감성이 담긴 자막이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좌우하고 콘셉트를 이끌어낸다. 영상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씬이지만 자막 한 마디에 우호적 관계로, 혹은 대치적 관계로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지루한 영상의 흐름을 긴박하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산만하거나 짧게 지나가버린 영상은 자막으로 보완해 주기도 한다.
이처럼 예능의 경우, 자막의 주역할은 콘셉트를 강조하거나 재미를 유발하는 것이며 이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면 산만해도, 화려해도, 촌스러워도, 그리고 안 읽혀도 괜찮다. 느낌으로 전달하는 역할이 더 중요하니까. 이 경우, 자막에 가독성은 필요 없다.
하지만 자기 계발 영상, 교육 영상, 강의 영상은 다르다. 이러한 영상 자막의 본질은 다큐멘터리 자막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전달해야 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재미'는 필요하지만 재미를 위해 선을 넘는다면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영상에서는 자막-제1의 역할, 가독성을 챙겨야 한다.
그럼 자막이 가독성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타이밍'과 '핵심 키워드'다.
이 2가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