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속 댑스(depth)의 역할
책을 고르거나 선택할 때, 나는 책의 목차를 유심히 살핀다. 목차는 그 책의 담당 에디터가 공들여 만든 '책의 요약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목차를 보면 책의 전체 흐름과 핵심 메시지를 가장 빠른 시간에 이해할 수 있다.
목차는 크게 '부(혹은 파트)' - '장(혹은 챕터) - '절(혹은 섹션)'로 나누어진다. '부'는 본문을 큰 주제로 구분하는 역할이며 1부, 2부, 3부 혹은 Part 1, 2, 3, 4 처럼 지칭하는 명칭이 콘셉트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래로 '장(혹은 챕터)'이 존재하고 또 그 아래 '절(혹은 섹션)'이 있다. 이렇게 책을 단계별로 구조화하는 것을 출판사에서는 '댑스(depth)를 만든다'라고 말한다.
그 후, 정리된 댑스에 맞춰서 일명 '도비라'를 만든다. 실용서를 보면, 책을 펼쳤을 때 오른쪽-왼쪽 2페이지 모두, 파트를 구분하는 페이지로 쓰인 책이 있는 반면, 어떤 책은 한 페이지만 파트 구분 페이지로 쓰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댑스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는 페이지를 '도비라'라고 한다. 내용을 크게 구분하여 확실하게 나눠줄 것인가, 아니면 호흡만 짧게 끊었다가 계속 이어가는 흐름으로 갈 것인가... 그 목적에 따라 도비라 페이지를 많이 잡기도 하고, 적게 잡기도 한다.
나는 어떤 콘텐츠든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댑스'를 만들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댑스'가 있다면 보다 구체적인 최종 완성본을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촬영 전에 '댑스'를 정리한다면 내용은 물론이고 영상 시작과 끝, 그리고 '댑스'를 나눌 때 필요한 요소까지 한 번에 챙겨서 촬영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촬영과 동시에 편집을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데 영상에서는 '목차', '댑스' 개념을 찾아보기 힘들다. 각 잡고 보는 수험생용 '인강'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영상은 일단 재생이 시작되면 댑스라는 개념 없이 일렬로 흘러간다. 요즘은 타임 태그에 링크를 달아주는 친절한 영상이 많아져서 어느 지점에서 무슨 키워드가 나오는지, 내가 원하는 정보가 몇 분 몇 초에 있는지 파악하기 한결 수월해지긴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영상 자체에서 '목차'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시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댑스'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비라' 역할을 하는 장치를 넣을 수 있을지... 여전히 편집할 때마다 늘 고민하게 된다.
영상에서도 '목차'와 '댑스', 그리고 그것을 시각화해주는 '도비라'가 중요한 이유는 크게 2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을 할 때 본인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쭉 나열하는 것보다 '~한 이유 3가지'라고 명시하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붙여서 설명한다면, 듣는 사람은 화자가 말하는 포인트를 쉽게 이해하고 기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상에서도 주제를 구조화하여 편집한다면 시청자들이 각자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볼 수 있기 때문에 기억하기 쉽고 결과적으로 영상의 가치 전달에 용이해진다.
두 번째 이유는 영상에 리듬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영상이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지면 우리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급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보다가 지친다. 영상을 보다 지치면? 나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고, 가차 없이 영상을 끄거나 다른 영상으로 갈아탈 것이다. 오늘 하루만 돌아봐도 끝까지 본 영상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영상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 그 힘중에 '댑스'가 하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 흩어진 집중력을 다시 끌어오는 시간, 주제가 바뀜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기대하는 시간, 잠깐 멈추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 흔히 인서트라고 표현하는, '댑스'가 바뀌는 1-2초에 불과한 이 짧은 시간이 영상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상 안에 '댑스'를 만들고 '도비라'를 심기 위한 시도를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활용하고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영상 중간에 1-2초 내외의 짧은 인서트를 넣는 것이다. 강렬한 인서트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냥 블랙아웃에 타이틀만 심어서 잠깐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비라'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편집자라면, 내가 편집하는 영상의 구조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심지어 구조가 없는 영상이어도,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상 한 편이 몇 덩어리의 파트로 구분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구분해주는 것이 효과적일지, 길게 끊을지 짧게 끊을지, '파트'와 '챕터'를 영상 내에서 구분시켜줄 필요가 있는지,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이 어울릴지... 그것을 고민을 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영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같은 효과를 쓰고, 같은 프리셋을 써도
조회수 차이가 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이유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