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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랑 Nov 01. 2020

그랜드캐넌은 그대로 둬도 괜찮습니다

  친구와 관계가 틀어졌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10년지기 친구와. 


  전조증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던 건 사실이다. 우리 둘 다 성인이 된 뒤로 예전만큼 붙어다니지도,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지도, 서로의 많은 부분을 알지도 못했으니까. 그러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다는 건 또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순식간에 나는 먼 우주에 홀로 남겨진 최후인류가 된 기분이었다. 실로 고독해졌다. 


  쓸쓸한 마음을 붙들고 술이나 한잔 하러 간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표정이 안좋아 보이는 나를 두고 친구는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다. 소주 한잔이 두잔이 되고, 거기에 맥주가 더해지자 속얘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냥, 그렇게 됐어. 이제 다 끝났지 뭐. 후련한 듯 후련하지 않은 마무리였다.


  헤어지는 길에 친구로부터 장문의 카톡을 받았다. 거기에는 상투적인 위로도, 충고도 그 무엇도 아닌 말들이 있었다. 친구가 보낸 것은 사진 한장이었다. 

|출처: 위키백과/그랜드캐니언(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9E%9C%EB%93%9C_%EC%BA%90%EB%8B%88%EC%96%B8)


  [저 협곡들이 다 평지였다면 그랜드 캐넌은 존재했을까. 아마 아니겠지]



  애썼던 거 알아. 이미 끊어진 것까지 이으려고 애쓰지 마. 거기서부터는 하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이 뒤를 이었다. 


  끊긴 관계는, 그리하여 사이가 비어버린 관계는 그대로 둬도 된다고. 그걸로 이미 몫을 다 했으며 충분히 아름답게 끝난 거라고. 애써 노력하며 그 사이를 메우려고 흙을 퍼붓고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그대로 두면 그 자리에 강이 흐르고 아름다운 협곡이 생기고 그리하여 새로운 사람들은 또 이끌리듯 올 거라는 말이었다. 



  내 카톡 프로필 뮤직은 가수 이소라의 <Track 9>이다. 시작부분에 이어지는 몇소절을 정말 좋아한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해 


  내가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리며 사는 생. 이제 누군가와 이별하고 늘 그랬듯이 당연한 고독으로 나아간다. 깨지고 부서진 관계들 사이에도 강이 흐를 것이다. 어느날은 지상의 유토피아로 다시 그 이름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만 좀 울기로 했다. 정말 오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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