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몇 주 전부터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기록한다는 취지가 좋아서 뒤늦게 신청했는 데 취소자가 생겨 운 좋게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지난 시간에는 내 인생의 열두 고비를 주제로 자서전을 쓰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인생 그래프와 연표를 그려보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글로 써나갔다. 기억의 문을 두드리며 연도별 나의 인생을 한 줄 한 줄 적다 보니 내 인생 속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는 부모가 나를 돌봐주고 결혼 후에는 내가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주는 삶이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내 인생이었지만 결코 나 혼자만의 인생이 아니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이번 주 독서 모임에서 읽은 것이, 홀로 서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준 계기였을까? 매혈 즉, 피를 팔아 가족을 지키려 한 허삼관의 절박한 행동은, 나에게 인생의 가장 강한 버팀목인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깊이 새겨주었다.
<허삼관 매혈기>는 중국 현대 소설이다. 중국 문학은 삼국지 이후 처음이었고 중국 현대문학의 중심에는 위화 작가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정우 감독의 영화 <허삼관>이 이 책을 원작으로 했기에 소설의 앞부분은 영화의 내용과 비슷하다. 허삼관은 아름다운 허옥란과의 결혼 비용 마련을 위해 매혈을 시작하고, 가족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피를 팔아서 해결한다. 첫째 일락이가 동생 이락이와 삼락이를 괴롭힌 방씨네 아들을 때려눕혀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피를 팔고, 대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가족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가족들에게 국수를 사주기 위해서 피를 팔고, 또 일락이의 간염 치료비를 대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연달아 피를 팔기도 한다.
사실 일락이는 허삼관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허옥란이 허삼관과 결혼 전에 혼사가 오갔던 하소용의 사이에 생긴 아들이었다. 이를 알게 된 허삼관은 일락을 심하게 차별하고 구박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일락이를 아들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각오하고 병원비를 마련한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세 아들은 모두 성장하여 독립하고 허삼관도 어느덧 60대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피를 팔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가 생겼지만 이제 가족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피를 팔러 간다. 피를 사는 젊은 혈두는 늙은 허삼관을 비웃으며 거절한다. 문득 허삼관은 자신이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허옥란의 위로와 함께 매혈 후 항상 먹었던 돼지 간볶음과 황주를 맛있게 먹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
이라는 말이 있지만 위화 작가는 이를 반대로 풀어냈다. 이 소설은 분명 멀리서 보면 비극인데 가까이 보면 희극이다. 중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가 소설의 배경이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중국인 5천만 명이 사망했다는 3년 대기근과 중국 사회를 혼돈과 광기로 몰아넣었던 정치적 숙청 운동인 문화 대혁명이 허삼관 네 가족에게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만 작가는 해학으로 풀어낸다. 대기근의 배고픔 속에서 허삼관이 아이들에게 상상으로 요리를 해주고 문화 대혁명 시기 허옥란이 기생이었다는 대자보에 가족끼리 자아비판을 하는 데 허삼관은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기도 한다. 비극의 역사 속을 살아가는 허삼관 네 가족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풀어낸 작가의 역량이 놀랍기만 하다.
당시 중국 사회에서 가족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극도로 억압적인 외부 환경 속에서 서로 위로해 줄 수 있는 구성원은 가족뿐이었기에 가정생활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는 대기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묽은 죽이라도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가족이 필요했고, 문화 대혁명 당시 개인적인 원수를 갚기 위한 거짓 대자보에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수난을 당하고 돌아오면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가족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마치 허삼관 네 가족처럼.
서두에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삶을 절대로 유지할 수 없다. 결혼 전후로 돌봄의 주체와 객체가 바뀔 뿐이다.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진짜 의미는 누군가를 돌보면서 타인의 삶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닐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
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그를 돌보았던 이들의 역사와 얽혀 함께 오는 웅장한 사건이었음을 깨달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