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역습
“엄마, 김치찜 먹고 싶어요. 버스에서 막 내리는 데 있잖아요. 그 앞에 있는 식당에서 김치찜 냄새가 나오는 데 와! 진짜, 대박.”
버스를 타고 전에 살았던 동네에 있는 스타(스터디카페)에 갔다 온 막내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내 뒤에서 소리쳤다. 막내는 흥이 넘치는 아이다.
“야, 그건 못해. 김치찜은 내 능력을 넘어서.”
구이 한 판, 어묵볶음, 김치 볶음, 소시지볶음 정도라면 만들 수 있지만 김치찜은 높은 장벽이다. 막내는 단호한 내 말에 혼잣말하면서 거실로 나갔다. 뭐라고 하는 거야?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 한계를 안다…. 는 건 핑계다. 사실, 귀찮았다.
한참 조용하다 싶더니 부엌에서 냄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해?”
“라면 끓여 먹으려고요.”
그래, 이젠 혼자 라면도 끓여 먹을 줄 알아야지. 뭐가 신나는지 이번엔 휘파람을 분다. 빅뱅의 ‘붉은 노을’이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이 떠올라 가사를 검색하는 나는 또 뭐냐!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면 슬픈 그대 얼굴 생각이나
고개 숙이네 눈물 흘러 아무 말할 수가 없지만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1988년에 발매된 곡으로 나오는데, 88 올림픽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하나 들춰보고 싶다. 단짝 친구가 초등학교(당시) 동창회 여회장을 맡았다면서 주말마다 남 회장을 만나러 다녔다. 남 회장은 우리 지역에서 최고 명문고 회장이었다. 야간 자율학습도 종종 빠지기도 해서 한 번은 내가 심통을 부렸다.
“야, 그렇게 자꾸 남학생 하고 데이트하러 나가면 어떡하냐? 언제까지 야자 빠지려고 그래? 불안해서 내가 공부를 못 하겠다.”
“걱정하지 마. 너 이번 토요일에 중앙시내에 있는 빵집에 나와. 우리 거기서 1시에 보기로 했어.”
“나는 왜?”
“응, 너한테 소개해 줄 애가 있어.”
“뭐? 싫어. 내가 왜.”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화창한 토요일 오후 나는 가장 예쁜 청치마를 골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후 소개팅에 나갔다.
친구가 소개해 준 남학생은 당시 우리를 설레게 했던 ‘천녀 유혼’과 ‘영웅본색’에 나온 장국영을 빼닮았고 장국영 열광적인 팬이었던 난 그 자리에서 홀딱 반해버렸다. 그 아인 어땠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근 1년을 만났던 기억이 나는 걸로 보아 그 애도 날 좋아했던 건 아닐까? 기억나는 선물이 당시 그 애가 우표수집이 취미라 수집한 우표를 선물했고, 자신의 아빠가 독일에 출장 갔다 사 온 거라며 만년필을 주었다. 나는 그 애에게 선물을 한 기억은 없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죽박죽 하던 시절이라 결국 공부를 핑계로 삼아 우린 그만 만나기로 했다. 아니다.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시내에 영수학원이 있었는데, 나는 수학이 부족해 주 2회 그 학원을 나가게 됐다. 그런데 우연히 그 학원에서 그 애가 다른 여학생과 다정히 이야기하고 있었고, 질투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감정에 학원을 그만뒀다. 그 뒤로 자꾸 속상한 마음이 생겨 학교 공부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 학원에 가서 그 애에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던 것 같다. 1년 후 각자 지원한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그 해 마지막 날 그 애가 다니던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연한 약속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고3 수험생이 되었다.
나는 고3 때 몸이 안 좋아 2학기부터 학교를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재수는 하기 싫어서 등급을 낮춰 대학에 원서를 냈다. 우울한 겨울을 보내던 그때, 갑자기 생각난 그 애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달력을 확인하니 12월 마지막 날이었고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2시였기에 여유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는지, 옷을 챙겨 입고 머플러를 머리까지 둘러쓴 채 버스를 탔다. 눈이 내렸다. 점점 더 굵어진 눈발에 내 심장 소리가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잠시 버스가 회전 교차로를 천천히 돌았고 신호대기에 걸려 음악사 앞에 정차했다.
어디선가 노래가 흘러나왔다. 변진섭의 ‘너에게로 또다시’였다. 음악사에서 나오는 거였다. 가사 중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왜 이리 힘들었을까.’ 부분이 내리는 눈송이와 함께 내 심장을 쿡쿡 눌러댔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그 애가 나올 거로 생각하는 내가 우스웠다. 그리고 솔직히 당시 치료 후유증으로 다리를 살짝 절고 있었던 터라 굳이 이런 모습을 그 애에게 보이고 싶냐? 하는 마음에 관뒀다. 그냥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창밖에 내리는 눈이 곳곳에 쌓여가는 풍경만 감상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 아인 날 기다렸을까?
새삼 궁금하긴 하다. 참, 그때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음악사로 들어가 변진섭의 엘피를 샀었다. 거금 4천 원을 줬다. 갑자기 또 엘피판이 생각나 막내 방으로 가서 찾았다. 있었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 천천히 들으면서 커피를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