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만 당연한 것들에 순응하는 것
재적응을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나름 첫 사회생활의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떤 분위기건 무슨 업무를 맡건 여유롭게 핸들링하리라 자부했다.
오산, 그리고 오만.
재취업의 첫 달을 회상하면 이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학창 시절,
나는 모범생이었다.
모범생의 기준을
공부를 곧잘 하고, 비행을 일삼지 않으며,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학생이라는 정의로 내린다면
나는 100퍼센트 그 범주 안에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반에서 1등을 놓친 적 없었고,
그 덕분에 자연스레 진학했던 특목고등학교에서도 나는 내 할 일은 항상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물론 특목고 친구들이 꽤나 비상해서 시골 중학교 출신의 나에겐 크고 작은 좌절감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생부터 어딘가 삐딱선을 탄 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 '삐딱선'이라 함은
남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것들에 대해
왜?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지속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 그런 것이다"
"긴 역사동안 그래왔으니 당연하게 보편타당한 것이다"
따위의 문장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원래 그런 것이 어디 있으며
당연히 그렇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마도 태어날 때 이 세상 모두가 당연히 가지게 되는 일반적인 가정환경,
누구나 가지고 있는 두 명의 부모라는 존재가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점이
'왜?'라는 끊임없는 질문과 반문을 하게 되는 반골기질을 키웠던 요소라고 추측한다.
그 뿌리가 무엇이었든 간에,
고등학생 시절 나는
졸음방지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맨 뒷자리 스탠딩 책상에서 졸리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서서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고,
2학년 선배 선도부의 행패(글자 그대로 그들의 행동은 정말로 행패였다)에 덜덜 떨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드는 학생이었으며,
또 어느 때는 수학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수학문제에 관한 질문이 아닌 엉뚱한 질문을 하는 학생이었다.
나는 그런 나를 사랑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며 깔깔 웃어주었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김대환 선생님은 나를 '못난 망아지'라는 애칭으로 불러주었으며,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내가 아닌
삐딱하지만 자유로운 내가 좋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돈'이라는 수단을 벌기 위해서는
그저 "넵." 하며 순응하는 태도가 필수불가결했다.
천방지축 순진했던 고등학생이 더 이상 아니기에,
모종의 책임감을 항상 가지고
모두가 강조하는 '사회인의 자질'을 갖춰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의 삐딱함이 점점 색을 잃어 가고 있었지만,
대기업의 환경은 나로 하여금 깊숙한 내면에서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하고픈 충동을 일게 했다.
새 회사는 여초회사였다.
여자 직원의 비율이 70퍼센트가 넘는 여초회사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직, 즉 팀장급 이상 임직원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남자였다.
또, 팀장급 직원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로웠다.
식사 시간부터 법인카드 사용, 회사 내에서의 Do or Don't까지
나에게는 적용되는 룰이
그들에겐 치외법권처럼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일례를 들자면
이따금씩 야근할 때면 만원을 넘기지 말아야 하는 석 식대 규정이 나에게는 적용되었지만,
누구와 먹었는지도 모를 강남의 유명 맛집에서 팀장님은 20만 원씩 쉽게 결제했다.
그리고 나의 법인카드뿐만 아니라
매주 맛집기행이라도 하는 것 같은 팀장님의 법인카드 전표처리는
막내직원의 몫이자 당연한 업무였다.
신기했고
불편했으며
궁금했다.
그럼에도 질문하지 못했다.
답은 지겹도록 뻔했기 때문이다.
"원래"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만족스럽게 그리고 순조롭게 두 번째 직장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은
오산이자 오만이었다.
한 달의 시간 동안
나는 튀지 않고 조용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으며,
타인과 비슷한 모양으로 동화되기 위해 끊임없이 내 몸을 정해진 네모 안에 끼워 맞춰 나갔다.
내면에서 계속해서 고개를 드는 반골기질을
애써 꾹꾹 눌러가며
불편함에 당연히 순응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