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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Feb 16. 2021

이탈리아에서 온 호인


한동안 입구 쪽이 시끌벅적하더니, 아흐마드가 손전등을 환하게 켠 채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녁 먹어. 새로운 친구가 도착했어.”


울적함에 휩쓸린 나머지 저녁마저 거를 참이었지만, 새로운 친구가 도착했다는 말에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애써 이곳까지 온 마당에, 아흐마드의 의미 없는 말 때문에 우울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겐 든든한 덩치의 야니스가 있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모여있으면 아흐마드와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흐마드가 만들어준 타진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아흐마드의 흙집 쪽으로 향하니 새 친구가 이미 도착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강하게 말려 올라간 검정 곱슬머리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이탈리아인으로, 이름은 마테오였다. 아흐마드는 우리를 위해 모로코 전통음식인 타진을 차려 주었다. 닭고기와 여러 종류의 채소를 향신료와 함께 삶아낸 요리였다. 여행자 세 명이 한자리에 모이니 어느새 어두운 밤이 활기로 물들었다. 저녁을 들고 난 후, 우리 셋은 아흐마드의 친구들이 피워준 모닥불 근처에 모여 앉아 그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일 하노버에서 온 야니스



독일 하노버에서 온 18세 청년 야니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들어가기 전 갭 이어(Gap year)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면 행복할지 아직 확신이 안 서. 갭 이어 동안 여행을 하며 대학에서 공부할 전공을 정하려고 해. 지금은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다른 것들에도 관심이 가서 신중히 생각해 보려고.”



(훗날 그는 심리학을 전공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마테오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28세의 ‘자유로운 영혼’ 마테오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여러 달 머물렀다. 이곳저곳 유명한 곳들을 기웃거리는 게 아니라 현지인들의 삶 자체에 녹아들고 싶었기에, 한 농장에 몇 개월을 머물며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프랑스에 있는 농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나와 공감대가 잘 형성되었고, 품고 있는 가치관들도 곧잘 맞았다. 나처럼 매우 적은 돈으로 여행하고 있었으나, 머리보다는 몸으로 부딪쳐보는 타입이라며 시원스레 웃어보이기만 할 뿐 부족한 예산에 대한 걱정 어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은 없어 보였다. 설사 불가능하다고 짐작이 되어도, 그는 이에 전혀 괘념치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해내기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통찰해내는 것이었다.


막상 와보고 싶던 곳에 도착했어도 낯선 환경 때문인지 외로움을 느끼던 참이었는데, 친구들과 모여 북적북적 떠드니 기분이 한결 풀렸다. 친구들이 차례로 자기소개와 그동안 해 온 여행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있는데, 어느덧 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다. 재미있게도 나는 야니스(18세)와 마테오(28세) 나이의 딱 중간인 23세(만 나이)였다.



대한민국 광주에서 온 나



“난 작년 여름에 한국에서 출국했어. 프랑스에 반년 동안 머물며 번 돈으로 여행을 시작했지. 모로코에 입국하기 전에는 스페인 북부를 약 900km 횡단하는 도보여행을 했어.”


“그게 정말이야? 너 진짜 대단하다!”



마테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영어에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억양이 진하게 묻어났지만, 오히려 완벽한 영미권 억양보다도 매력이 있었다. 당당한 눈빛과 호쾌한 말투는 어딜 가든 눈에 띌 호인의 그것처럼 보였다. 외국어를 말하는 게 아주 유창하진 않아도, 차라리 틀릴망정 자신 있게 대화를 주도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활기찬 기분이 되었다. 덥수룩하지만 멋스럽게 정돈한 검은 머리칼과 수염에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그는 쏟아질 듯 출렁이는 밝은 갈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다소 화난 듯이 말했다.



“이 썩을 스물여덟 살! 부모님은 내가 이 나이에 그저 여행만 하러 다니는 걸 이해하지 못하셔. 내가 스물여덟 살을 먹은 게 뭐 어떻다는 거야.”



늘 눈이 반짝였던 마테오



야니스와 단둘이 일하던 날과는 달리 일손이 한 명 더 늘어 작업이 수월해졌다. 야니스, 마테오와 함께 흙집 주변의 비포장 지면을 포장하는 작업을 할당받았다. 사막 바로 근처이다 보니 온통 땅이 모래로 뒤덮여 있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흙집 주변이라도 고르게 정돈하기로 했다.



우리들의 작업장



일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깊게 파인 우물에서 끌어 올린 물로 작은 웅덩이를 만든 뒤 진흙과 모래를 잘 섞어 천연 시멘트를 만들었다. 야니스와 마테오가 진흙을 섞어 움막 쪽으로 운반해 오면 내가 이를 바닥에 고르게 깔았다. 진흙을 단순히 땅에 바르는 게 아니라 표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용구를 이용해 땅의 기복이 없도록 꼼꼼히 다져야 했다. 노동 강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건 악명 높은 사하라의 기후였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땀을 비 오듯 흘리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녹진한 모래 위에서 손수레를 끄는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건장한 청년들인 야니스와 마테오가 괴성을 지르며 있는 힘껏 밀어야 겨우 바퀴가 굴러갔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일하다가 아흐마드가 차려 준 점심을 먹고 나선 다음 날 오전까지 휴식을 취했다. 쉬는 시간은 길었으나 해가 지기 전까지는 날이 몹시 더워 잠을 청하는 것도 힘들었다.



흙집 주변의 땅을 고르게 포장하는 작업



아침이 될 때마다 늘 같은 일을 반복했다. 덥고 건조한 기후 때문인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기운이 빠졌지만, 작업하는 요령이 생긴 후로는 그리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었다. 아침을 먹을 때부터 이미 더위에 지쳐 병든 닭처럼 골골대던 우리는 외려 작업을 진척시켜 나가면서 기운을 되찾았다. 특정한 작업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대개는 점심 식사 전까지만 했다. 쉴 새 없이 일하는 나와 달리 마테오는 본인에게 필요한 휴식 시간을 어김없이 확보했으며, 노동량이 과중하다 싶으면 이에 대한 이의를 강력히 제기했다. 그 덕분에 나 역시 적절히 휴식을 취해 가며 일을 할 수 있었고, 본인의 의사를 틀림없이 표출하는 법도 배웠다.




작업 결과물. 울퉁불퉁했던 지면이 고르게 다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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