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나의 문이 열리면 또 다른 경기가 시작되고 링 위에서 내려오면 또 다른 문이 열려 있다. 그것은 비단 육아만의 일은 아니다. 일하는 과정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링 위의 경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링 위에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아도 경험이 손을 내밀어주고 시간이 엉덩이를 툭툭 털어줄 것이다.
이렇게 정리될 때까지 오랜 시간과 많은 경험치가 필요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서로에 대한 공허와 갈증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무엇보다 나에게는 글과 그림이 있었다. 그림 그릴 시간이 없을 때는 메모를 했다. 차분하게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호사였고 노트에 짧은 메모나 스케치를 해두는 것으로 기억을 잡아두었다.
어느 날, 사슴 한 마리가 눈앞에서 빠르게 왔다가 사라졌다.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순식간에 사슴 한 마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져버린 것이다. 쫓아가 보았지만 바람만 고요했다. 집 바로 옆에서 키우는 다섯 마리 사슴 중 한 마리가 도망친 줄 알았는데 결국, 아무 일도 없었고 사라진 사슴은 길잃은 고라니였다. 내가 놀란 만큼 그 녀석도 깜짝 놀라 줄 달음박질 쳤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황당함이란. 결국 메모만 해놓고 그림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해묵은 기억이 이렇게 글을 쓰면서 15년 전을 끄집어 내고 있다.
햇살 가득한 마당에 매일 이불을 널었다가 빨랫방망이로 탕탕 두들기던 모습까지 도미노처럼 연결되었다. 그래, 나에겐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잠재된 기억이 있어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히게 억울했던 육아일기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도 아이들이 빨리 건강해져야 한다는 욕망에서 살짝 빗겨 나고 난 후의 이야기이다. 다행히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주는 아이들 덕분으로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할 이야기가 많았던 나는 parkeunkyoungstory 라는 친환경 제품을 만들어 팔 수 있는 행운과 함께 ”박은경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이외에도 육아일기에서 시작해서 부부 이야기, 생성과 소멸에 관한 11번째의 개인전과 120여회의 기획전시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 살 만하다 싶었다. 그런 나에게 보이스피싱 사기라는 커다란 사건이 있었고 많은 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시흥시에서 접수된 사건 중 최고 피해 금액이라고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돈의 무게보다 사람에 대한 상실감이 더 컸다. 어떻게 사람들을 다시 만나 ’관계‘라는 것을 맺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겁이 나서 집에만 있던 그때, 사건이 있기 전에 신청해 두었던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되었다. 힘들어도 온라인 강의이니 가능했다. 예전에는 고통을 마주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십 오 년 만에 할 수 있었던 것도 고통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이제 겨우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도 아파서 쓰다가 멈추고 쓰다가 멈추기를 반복했었다. 그런데 태풍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글을 쓰라고? 그게 과연 가당키나 할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시간‘이었다. 순간순간 시간을 견뎌내야 했기에 낮에는 양말노점을 나갔고 밤에는 글을 썼다. 누워서 잠이 바로 들 수 있게 몸을 혹사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기존에 하고 있었던 단식지도는 진행하고 있는 분들만 코칭하고 두 달 정도 중단했었다. 내 앞가림도 못 하면서 누구를 코칭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마음이 편했고 두 달 정도 양말노점을 나가면서 단골도 생겨서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르신들은 젊은데 열심히 산다고 이뻐해 주셨다. 초짜 티가 나서 손님들이 이리저리 코치해 주는 예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잘 지내다가도 이렇게 오천 원을 벌기가 어려운데 내가 버린 돈의 액수가 문득문득 떠오르면 눈앞이 뿌옇게 희미해졌다. 양말이 좋다며 다시 사러 오신 아저씨는 사업하다 망해 골프가방 하나만 들고 한국으로 들어왔다면서 상점에서 배달하고 있는 지금이 마음은 가장 편하다는 이야기를 술술술 꺼내 놓으셨다. 그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니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면서 이런 것 안 하게 생겼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생각나는 것을 바로바로 메모할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녹음했다. 그리고 밤에는 글을 썼다. 처음에 쓴 글을 보면 분노감 가득했던 글들이 한편, 한편 씌여지면서 차분하게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기억을 타고 태풍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풍의 중심은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