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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ug 12. 2021

나에게 그렇게 간절한 것이 있었던가



모두 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하고 있는 일을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친구들이다.

그녀들과 몇 달 전부터 함께 책을 읽고 있는데 어제부터 본깨적 독서법을 적용해서 하기 시작했다



본깨적 독서법이란

책에서 본 것, 깨달을 것, 적용할 것을 생각하고 나누는 독서법이다

오래전 어린이 도서연구회 활동을 할 때도 독서토론을 했었는데 차이점은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명확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것이 읽을 때의 감정과 생각이 다르게 때문인 것처럼

5명이 썼던 "본 것"은 지금의 일과 심리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그 마음이 그대로 읽혔다

우리는 서로 현재 무슨 일을 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각자가 "본 것"의 이유가 잘 읽혔다.

어제 이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심리상태에 따라 책이 읽힌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나의 현재를 잘 감지하고 있으면 강점과 부족한 점이 보이게 된다.

강점은 강점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인식을 한다는 것은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갑자기 살이 찌네'라고 인식하면 왜 살이 찔까? 요즘 술을 먹었어라고 하면 술을 줄일 것이고

과식을 자주 했으면 먹는 것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칼로리 낮은 음식을 찾게 될 것이고

우연히 지나치다 칼로리 아웃 광고가 눈에 띌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이든 자신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으면 더 잘 보인다는 것이다.



부부관계가 소원하다고 인식하면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부부대화법 영상을 클릭할 것이고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면 생각지도 않은 경매를 알려주는 인기 유투버의 재생 버튼을 누를 것이다

명상이 잘 안되고 운동은 해야겠고 아이 따라 요가를 갈까 하다가 백팔배가 눈에 확 띈 것처럼

무엇이든 원하는 마음 향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디선가 해결책이 뿅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그 마음이 간절한 가에 따라 더 잘 보이고 잘 읽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5명 각자의 인식에 방향에 맞게 원하는 방향으로 "본적"이 쓰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던가



작은 절망감 때문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절망감도 느끼고 싶지 않아 굴을 파고든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27살 무렵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하고 한 주간 전시장을 지키면서 아주 행복했다

그때는 그런 표현이 없었지만 요즘 말로 뼈를 갈아 넣었던 전시였다.

추상과 비구상이 주류이던 그 시절 자다 냉장고를 열고 콜라를 마시는 여자, 가스불에 담뱃불을 붙이는 여자

몸안의 벌레를 찾는 남자, 작업실 바닥이 갈라지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여자가 있는 작품을 보는

관객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평론가는 어디 이런 일러스트를 감히 신성한 대학 안에서 그릴 수 있었냐고

그동안 욕먹지 않았냐고 물어봤을 만큼 우려도 있었지만 우연히 들렸던 기자는 일상을 화두로 한 특별한 전시라고 기사를 써주었다. 미대생들의 반응은 지금처럼 sns 있었다면 막퍼다 나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던 전시를 접고 트럭 두대에 그림을 싣고 와서 둘떄도 없는 작업실에 켜켜이 쌓으며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 후로 회복이 안되었고 그림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어떤 일이든 70% 정도의 에너지만 쓰게 된 것 같다. 하고 싶은 열정은 가득 하나 자신감이 없으니 내가 파놓은 굴에서 사부작사부작 내가 만족할 만큼의 최선만 다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절망감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라면서


그렇게 내가 쳐놓은 안전지대를 이제 알아차리고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으니 책의 문장이 보였던 것이었다.  심리를 반영하기에 앞서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보였던 것이다.

명확히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감지만 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울타리를 걷어내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그것을 보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깨닫고 적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관계에서는 꽤 쓸모가 있다.

바라는 것이 크면 늘 탈이 나는 것이 관계이다.   불교에서는 일심 이체(一心二體)라는 말이 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친구 간에 모든 관계는 "이체(二體)" 즉 서로 다른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심(一心)이 될까?


퍼즐이 맞춰지듯 딱 맞는 상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옷을 갈아입듯이 상대를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일심이 될까?

상대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일심이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생각하는 것, 보는 것 ,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심(一心)이 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드라마인지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부인 말을 잘 듣자"라고 벽에다 어떤 남편이 붙여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혜로운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남편 말을 잘 듣자라고 하면 수월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볼 때도 있다.  상대의 말이 설사 잘못된 판단이어도 서로를 인정하는 이런 말은 '수동적인 태도'라는 부정보다는 '인정하는 태도'라는 긍정의 마음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어제는 본단식을 마무리하고 회복하는 날이었다.

단식을 하다 보면 계획보다 연장할 때가 있다. 10일 단식을 했으니 4일만 더하면 뼈의 온도가 올라간다는 시기이기도 하고 생체주기에 맞춰 2주를 하면 좋을 것 같아 4일만 더 하자고 점심에 생식을 걸렀다.


저녁밥을 차리는데 "언제 정상적인 밥 먹어?" 한다. 저녁밥 먹고 산책하다 맥주 한잔이 하루의 낙인 남편이야말로 견디는 50일이다. 그래서 저녁에 생식 한포를 먹고 회복을 하기 시작했다. 약속한 대로

일심 이체(一心二體)는 상대의 마음과 생각으로 생각하면 몸은 다르나 하나의 마음이라는 뜻이었다.

쉽지는 않지만 고민이 될 때는 명쾌한 해답을 주기도 한다.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끌려다녀 불만이 생길 수 있지만  상대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적용하면 내 선택이기 때문에 불만이 없게 된다.



나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차리려면 나를 위한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원한다면  어디선가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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