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치오 비롤리 저
예상대로 순탄하게 책이 읽히진 않았다. 일종의 사상서라서 그런지 몇 문장 읽고 나면 무슨 말인지 혼동이 되고, 알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모르겠고, 비슷한 문장들의 반복적 패턴에 약간의 지루함과 싫증마저 들어서 더욱 더디게 흘러간 것 같다. 그저 한번 더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겨우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작년 여름 토요일자 신문의 책 리뷰를 통해서다. 어떤 기업인이 이 책을 추천한 것을 보고서 관심이 생겼는데, 추천 내용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기업 운영에 있어서 공화주의적 요소들이 좋은 참고가 되는데,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점들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내용과 별개로, 나는 어떻게 기업인이 이런 책을 추천했을까에 관심이 갔고, 그래서 인터넷에서 책을 살펴보고 나서 구매를 결정했다. 다만, 읽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1년 반이 흘러서 이제야!
일단 대략적인 느낌은 이 책은 전형적인 정치사상서라는 점이다. 공화주의에 대한 그 기원과 전개과정,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에 기원한다는 소신, 그리고 그것들과의 차이점을 다양한 학문적 자료를 토대로 전개해나가는 점에서 그랬다. 그리고 공화주의의 필요성과 이를 위해 함양되어야 하는 것들을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점 역시 그렇다.
예속, 주종관계의 현실과 그 가능성의 배제-공화주의 / 간섭과 제약의 배제-자유주의 / 시민적 덕성(비르투)과 공공선을 위한 애국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허울 / 뭐 이런 느낌으로 책의 내용을 대략 그려보면 될까? 주종관계에서는 주인이 간섭과 제약을 가하지 않다가도 언제든지 예속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의 자유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시민적 덕성도 발현될 수 없다. 따라서 공화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이 구현될 때 진정한 민주주의 즉, 공공선을 위한 시민들의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 대략 이 정도로 우선 이해하고 넘어간다.
중간중간 인상적이었던 건 정치적 수사, 즉, 수사학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이다. 공회당에서 정치인들이 합리와 이성에 기반한 토론을 할 게 아니라, 말하기 기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 점이다. 언뜻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는 다른 듯한데, 영국의 PMQ(Prime Minister's Question)를 생각해보니 이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때로는 조롱과 야유, 때로는 역사와 고전의 향연, 그리고 현실 직시와 냉정한 논박 등의 전개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영국의 PMQ가 그에 부합하는 게 아닐지. 때문에 우리도 이제는 대통령이 직접 국회에 나와서 국회의원들과 질의응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비르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그렇거니와 로마 관련 책들에서는 이 비르투라는 말이 빈번히 언급된다. 이 책에서도 수시로 (시민적) 덕성이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영어의 virtue의 어원.
또한 이탈리아. 이 책의 저자가 이 글을 쓴 목적 중에서는 아마도 자기네 조국의 훌륭한 공화주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더욱이 공화주의 정신이 전 세계적으로 약화되고 변질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이탈리아의 공화주의를 가지고 나온 것 같은데, 이 때문에 군주론이라든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라든지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고전들을 탐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탈리아 전반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근데 이런 고전 대작들을 육아휴직 동안에 섭렵할 수 있으려나 ㅎㅎㅎ 이 중 한 개만이라도!
기업인이 추천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책 후반부의 덕성, 애국, 공동체주의 부분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열정 고양과 이를 위한 참여 보장 그리고 제도로서의 확립 부분이 반복 언급되는데, 아마도 이 점에 포인트를 둔 것이 아니었을지 생각된다. 회사 직원들은 급여와 승진이라는 사적 이익과 함께 회사 전체라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참고한 게 이 부분에서였지 싶다. 물론 다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동안 공화라는 글자에서 비교적 쉽게 그 의미를 생각하곤 했는데, 막상 이 책을 읽고서는 좀 더 근원적이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면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좋았다. 페이지수가 많지 않아서 다음에 또 읽고 싶어 진다. 곧, 조만간에. 그때는 조금 더 깊이 그 의미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으려나?
공화. 멀리 지역사회와 국가로까지 갈 필요 없이 가정에서도 적용하고 발전시키면 좋을 개념이자 사상이지 않을까. 예속, 주종, 종속, 자의적 의지의 배제, 그럼으로써 평등한 관계 수립, 덕성 함양과 열정 발현, 공공선 추구, 모두의 행복, 민주적이고 수평적 관계의 지속 확립 등등.
Res Publica!
2020. 12. 29. 새벽녘에.
2020. 12. 30. 연말을 앞두고 올려보는 앞선 독후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