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쪽 지방과 달리 이 곳 마산은 3월 중하순쯤이면 바닷바람을 통해 따뜻한 공기가 서서히 스며들어 바야흐로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차가운 기류 속에 느껴지는 그 따스함이 좋아 고향의 3월을 참 좋아했는데, 타지에서 오랜 생활을 하면서도 이때가 되면 항상 어릴 적 마산의 추억을 떠올린 건 그 때문이다.
차로 10분이면 이런 아름다운 바다와 따스한 햇살을 어디든 볼 수 있다. 세계 3대 미항에 버금간다던 말을 이제야 실감한다.
3월이 시작되면서 평일 오후에 아이가 학원에 있는 2시간 30분 동안이면, 나는 노부모님을 모시고 주변 동네나 마산, 창원, 진해 등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걷기 및 산책 그리고 주요 관광지 및 커피 명소 방문 등으로. 그렇게 3월을 지내다 보니 앞서 언급한 옛 시절, 그 3월의 봄기운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샘솟기도 하면서...
진해 내수면생태공원 & 부모님의 뒷모습. 내가 어릴 적엔 마산이 중심도시였기에 창원이나 진해로는 그렇게 다니질 않아 잘 몰랐는데, 이제야 다녀보니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을 줄이야.
그리하여 지난 3월 말, 잠시 짬을 내어 나는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 집이 있던 곳에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다시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방과 후 신문배달을 했던 길들을 따라서 옛 추억을 더듬었다.
3.15의거 기념탑. 이젠 국립기념일로 격상되었다. 3.15의거에 참여했던 선생님들로부터 우리는 당시상황을 자주 들었다. 3.15의거, 부마항쟁의 정신이 그렇게 전승되어 나간다.
신문배달 길은 작년에 귀향을 하면서 추후 여유가 생기면 꼭 한번 걸어서 다녀보고자 했던 곳 중 하나다. 뭐랄까, 단순한 기억을 넘어 추억이, 그것도 나 스스로 만들어간 아련한 추억이었기 때문인지 늘 남성동 시장 앞을 지나갈 때면 마음속으로 꼭 한번 그때의 길들을, 신문배달을 하던 동선 그대로 따라가 봐야지 했었다.
이날 대략 20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보폭의 두배 걸음이면서 신문도 들고 있지 않기에 이렇게 짧은 시간이었던걸까. 그 시절의 2시간이 이 날은 20분에 불과했다.
남들이 들으면 피식 웃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1988년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인생의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시절 친구들한테도 그런 말을 곧잘 했던 기억이 있는데, 5학년이 되면서부터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도 많아지고 또 활동도 다채로워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이전에는 그저 동네 뒷산이나 학교 운동장, 전자오락실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그때그때 놀고 지냈다면, 5학년이 되면서는 친구들과 특정한 시간에 약속이란 걸 잡고서 이전과 다른 롤러스케이트장도 가보고 프로야구 시범경기도 가보는 등 뭔가 다른 패턴의 새로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방과 후 신문배달을 하면서부터는 호주머니 사정이 한층 좋아져 마음껏 오락실을 들르고 사고 싶은 것도 살 수 있어서 꽤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어느 시점부터는 친구들 한두 명을 나의 조수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나도 수월하게 배달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친구들 역시 하루 일당을 넉넉히 받아갈 수 있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이 나의 신문배달 조수 역할을 또 할 수 있는지 묻곤 했었다.
당시 나는 110부에서 120부 정도를 신문보급소에서 배분받았다. 그러면 양 팔에 각 25부 또는 30부씩을 감아서 안고, 또 여기에 60부를 넣은 가방을 둘러멘 채 배달을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그때는 지금처럼 32면 또는 40면짜리가 아닌, 16면 정도로 얇게 발행되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정기구독처에 배달할 신문은 대략 90부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 나머지 20부 또는 30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팔거나 또는 원하는 사람에게 팔았는데, 이게 꽤 쏠쏠했다. 비록 배달부수는 제일 많아 힘들기는 했지만, 시장통이 담당 구역이다 보니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지나가기만 하면 신문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당시 낱부 판매는 150원으로 기억하는데, 이런 가외수입만 하루에 많게는 2~3천 원, 아무리 적어도 1천 원 이상은 발생하여, 1988년의 5학년생 치고는 꽤 많은 현금을 보유한 사람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 이 때는 번데기, 풀빵 등을 참 많이도 먹었던 때다. 시장통의 번데기 파는 아저씨와 풀빵 파는 아주머니와는 각각 신문으로 그분들이 파는 먹거리와 물물교환을 했기 때문에ㅎㅎㅎ
대표적명소인 어시장 맞은편의 남성동 시장. 당시 핫플레이스인 창동-부림시장과 연결되어 이 곳 유동인구는 엄청났다. 어릴때라 비오는날 배달할땐 간혹 무서움을 느꼈던 남성동 성당^^*
이후, 어느 정도 배달이 익숙해지자 넘쳐나는 현금을 주체하지 못하여^^;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심심하거나 할 일이 없으면 두 시간 정도 나를 도와달라고 했고, 나 역시 친구들이 만족할 정도로 일당을 주다 보니 나도 힘을 덜고 편하게 신문배달을 하게 되어 서로 윈윈 하는 활동이 되었다. 어쩌면 나름의 경제관념도 이때부터 형성된 건지 모를 일이다.
※ 이때 나의 조수 역할을 하던 친구들 중 한 명은 나중에 내가 신문배달을 그만둔 후에 내 구역을 이어받아서 배달을 해나갔다.
이런 기억을 더듬으며, 또 바뀌고 달라진 시장통 풍경을 보면서, 그리고 그때는 그렇게 넓다고 생각했던 곳을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나는 1988년의 봄을 2021년의 봄과 마주 대하면서 나만의 내 머릿속 영사기를 돌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