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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차 부부의 하루

by 은하수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어제 중간고사를 끝내고 밤새도록 게임을 하던 막내는 한참 자고 있었고,

남편은 시골 밥상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여보야, 우리 산에 가자.”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은

“안 그래도 일어나면 그 말 하려고 그랬다.”며

벌떡 일어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끓여 나눠 먹고

물 한 통, 배 하나를 깎아 길을 나섰다.


청수장 입구에서 김밥 두 줄을 사고

오뎅을 2개씩 사 먹었다.

뜨끈한 국물을 먹고 나니 몸이 따뜻해졌다.


우리들의 등산 코스는 언제나 인적이 드문 쪽…

형제봉 가는 길을 천천히 걸어 올랐다.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가슴이 탁 트이도록 맑고 시원했다.


올라가며 요즘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들…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그리고 더 배려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말하기 전에

내 생각을 알고 또 그 해결책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새삼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아침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며 언젠가 내가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결혼은 파티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있는 험준한 산을 걷는 것이다.

때문에 화사하고 예쁜 파티 신발 같은 배우자를 고르기보다는

오랜 시간 힘든 산행을 견딜 수 있는

투박하지만 편하고 튼튼한 등산화 같은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구절…


읽으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들 힘들다는 요즘, 새삼 맞는 말이라 느끼는데…


어느새 앞서가던 남편이 오르막길에서 조심하라며 손을 내민다.


욕심내지 않고 우리가 힘들지 않을 만큼 산에 올라

2줄 3천 원, 소박하지만 영양 만점인 아침을 먹었다.


2시간의 산행을 끝내고 내려오니, 산 입구에선 우리 농산물 시장이 펼쳐졌다.

치악산 산마와 주왕산 얼음꿀 사과 중 어느 걸 살까 고민하다

맛보기가 맛있었던 사과를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12시가 가까웠는데 막내는 일어나지 않았다.


점심은 간단하게

된장찌개와 계란찜, 김과 무 장아찌, 김치.

시험을 잘 본 아들은 불고기와 계란찜.


모기에 물려 새벽 4시부터 일어나야 했던 남편은

밥을 먹고 그새 낮잠을 청했다.


나는 밀린 집안일을 후딱 해치우고는 남편을 깨웠다.


함께 쑥뜸을 뜨러 가고 싶었는데

맞는 시간이 토요일밖에 없어서 일주일을 기다렸기에

남편의 단잠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쑥뜸집에 도착했다.

쑥뜸이 만병통치는 아니지만

친구의 권유로 두 번 했는데 속이 편안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쑥뜸이 어색했지만

남편은 무지 좋다는 부인의 말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순순히 쑥뜸에 몸을 맡겼다.


세 번의 뜨거운 쑥뜸질이 끝나고

온몸에 쑥 냄새를 풍기며 우리는 한낮의 거리로 나섰다.


지하철을 타려는데 남편이

자켓 하나만 사게 아울렛에 들렀다가 가자고 운을 띄웠다.


사실 남편 회사 출근복이 정장에서 캐주얼로 바뀐 뒤

입을 옷이 없긴 했는데…


예정에는 없었지만 지하철을 환승하며

좋은 옷 싸게 파는 유명한 아울렛에 도착했다.


10만 원이 넘는 옷은 패스.

80% 세일을 하던 P.A.T에서

합치면 정가 100만 원이 넘는 옷 3개를 12만 원에 살 수 있었다.


조끼와 잠바가 세트로 붙은 옷,

세련된 반코트, 그리고 자켓까지…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을 싸게 사니

부자가 된 듯,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아들 츄리닝과 내 겨울코트까지 사니

정확히 20만 원이 지출되었다.


살짝 빵꾸 날 생활비가 걱정되었다.

3개월 할부니까…

조금 아끼면 되겠지…


기뻐하는 남편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식사 시간.

아들은 사촌 동생과 놀려고 오빠 집에 갔고

우리 둘만 있는 단출한 시간.


호박전에 된장찌개, 오이소박이, 콩잎 장아찌, 김을 앞에 두고 보리밥을 먹었다.


쇼핑한 옷들을 정리하고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하고

바쁜 주부의 일상이 흘렀다.


살짝 피곤했지만…

며칠 전부터 벼르던 성북동 슬로우 가든을 가기 위해

남편과 집을 나섰다.


한 잔의 커피와

달콤한 아이스크림 와플,

그리고 편안한 의자.


20년 전 같으면

함께 있는 시간이 아쉬워

몇 시간이고 찻집에서 버텼을 텐데…


30분 만에 후딱 먹어 치우고는

집에 가서 발 뻗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큰맘 먹고 온 곳인데…

들인 돈이 아까웠지만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 가자.”


집에 오니 남편은 이불 펴자마자 잠에 빠져들고

나는 새벽까지 이렇게 글을 쓰며 하루를 정리한다.


20년 차 부부의 하루가 이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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