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저는 하루 두 번 버스가 들어오는 산골에서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몸이 약한 어머니께서 동생들을 연달아 낳으셨기 때문에
맏딸인 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친할머니께서 키워주셨습니다.
어스름 새벽빛이 창호지 문을 뚫고 들어오면
저보다 먼저 일어난 할머니의 잦은 기침 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더 잠을 청하려고 아랫목으로 파고들지만
배고픔이 잠을 깨우는 아침.
할머니는 부엌으로 가서 군불을 때시고
저는 마루 밑 광으로 기어들어가
감자를 꺼내 옵니다.
밥 위에 얹어 찌면 분이 뽀얗게 올라올 감자를
숟가락으로 껍질 긁는 것은 제 몫의 일이었습니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푸른 빛이 더 많은 김장김치,
그리고 간장에 담근 고추 장아찌밖에 없는 밥상이지만
꿀맛이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혼자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삭막한 도시에서 살지만 언젠가는 시골에서 살고 싶은
오랜 소망도 그때 그 추억이 가져다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한참 놀다 목이 말라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면
할머니께서는 부뚜막에 놓여 있는
물항아리에서 물 한 그릇을 떠서
주시며 “천천히 먹어라, 물 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죠.
오래오래 할머니와 살고 싶었지만
학교는 서울에서 다녀야 한다는 부모님들의
교육 방침에 따라 할머니와 눈물의 이별을 하고
시골 촌뜨기는 서울 다마내기가 되었습니다.
손자손녀 중에
저를 제일 좋아하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할머니 장례식이 끝나고 제가 서울로 가져온 것은
손잡이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할머니의 물항아리와
감자 껍질을 잘 긁을 수 있는 숟가락 하나입니다.
지금도 수도물을 받아 두었다가
몇 시간만 지나면 물맛이 달라지는
저의 정수기 — 할머니의 물항아리.
지금 살아계시면 백 살도 넘으실 할머니가 쓰신 항아리라
족히 60~70년은 넘었을 항아리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릇입니다.
유약이 제대로 발라지지 않은 촌스런 물항아리를 쓰다듬으며
40여 년 전 그때로 잠시 떠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