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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09. 2022

킹 앤 퀸 카운티의 킹 앤 퀸 법정

우리가 미국 법정에 출두한 사연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 중 하나는 단연 우리 부부의 명의로 자동차를 샀을 때였다. 뭐 대단한 슈퍼카를 산 것은 아니고 그저 당시 우리의 주머니 사정에 맞게 혼다에서 만든 시빅(Civic)이라는, 한국 차로 치자면 아반떼급 준중형 차를 마련한 것일 뿐이었지만 차키를 넘겨받던 날은 마치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던 날 만큼이나 기뻤다.


우리에게 자동차를 판매한 딜러는 흰색이나 검은색 차를 사야 나중에 높은 가격으로 되팔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만큼 무난한 색상의 차를 원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돈 이야기에 마음이 잠시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고심 끝에 우리는 결국 흔치 않다는 갈색을 선택했다. 가격 차이가 나봤자 얼마 나겠냐 싶기도 했고 나중에 되팔 때 기쁜 것보다 지금 당장 그 차를 타는 우리의 마음이 만족스러운 것이 더 큰 행복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갈색 빛깔 시빅이 우아한 자태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던 순간을 그날로부터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군계일학이라는 말은 우리 시빅이를 가리키는 말이 분명해. 바로 옆에 람보르기니 할아버지가 서 있대도 우리의 꼬마 시빅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한낮의 햇살 아래 우리의 자동차만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 같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 돈으로 차를 사는 기쁨이란 그런 것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워낙에 좋아하고 운전도 즐기는 우리 부부는 그 작은 자동차를 몰고 워싱턴 DC에서부터 남으로는 플로리다주, 북으로는 메인주, 서쪽으로는 텍사스주와 미시간주까지도 몇 차례나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부터 차로 네다섯 시간가량 떨어진 뉴욕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거리였고 그보다 가까운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까지는 동네 마실 가는 기분으로 밥 먹듯 다녀오곤 했다. 새 차를 사서 이렇게나 알뜰살뜰 잘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기대 이상으로 좋은 가격을 받고 중고로까지 되팔 수 있었기에 마무리까지 훈훈한, 그야말로 효자 자동차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우리의 꼬마 자동차와 함께한 나날이 늘 기쁨만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주차위반 딱지나 속도위반 딱지가 서글펐는데 유학생 없는 살림에 거기에 적힌 금액들은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속도위반 티켓 하나가 날아왔다. 그곳엔 200달러쯤 되는, 당시 우리 부부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했던 벌금과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 내용에 반박할 이유가 있다면 킹 앤 퀸 카운티의 킹 앤 퀸 법정으로 찾아오시오.'


남편과 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킹 앤 퀸 카운티라는 동네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지도를 들여다보았고 집에서 남쪽으로 두 어 시간 남짓 떨어진 위치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다. 순간, 200달러짜리 청구서를 쥐고도 철없이 여행병이 도진 우리 둘은 이름마저도 낯선 그 동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인구가 7,000명이 안 된다는 그 작은 엘 이번이 아니고서야 언제 가보겠나, 그리고 이참에 미국 법정 구경도 해보는 거 아니겠냐. 게다가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보니 판사에게 벌금의 부당함을 잘 호소하면 내야 할 금액을 진짜로 깎아주기도 한다는 게 아닌가! 좋았어! 이제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속전속결로 여행 계획(?)을 세운 우리 부부는 킹 앤 퀸 법정으로 출두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가겠다는 결정은 신나고도 빠르게 내렸지만 진짜로 법정에 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떨리기 시작했다. 법정에 서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둘 다 모국어가 영어도 아닌데 일반 용어도 아니고 법정 용어를 혹시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나도 그랬는데 직접 판사 앞에 서야 하는 남편은 더욱 떨렸으리라.

긴장으로 얼굴이 굳은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한참 동안 혼자서 중얼중얼 연습을 하는가 싶더니 밤이 되자 나를 의자에 앉혔다. 내가 판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설득력 있게 잘 말하는지 냉정하게 봐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내 앞에 선 그는 거의 중세시대 영국의 왕 앞에 선 농노 같은 태도로 친애하고 존경하옵는 판사님께로 시작하는 길고 긴 소문을 읊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의 유학을 준비할 당시 면접을 앞두고도 이렇게까지 열심인 적은 없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공손함을 넘어 비굴한 저 태도는... 이제껏 그런 남편을 본 기억이 없는 나는 그 모습이 웃긴 것을 넘어 가슴 아플 지경이었다. 덩달아 심각해진 나는 결심했다. 남편이 이렇게까지 노력을 하는데 나도 뭐라도 도와야 하지 않을까?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법정에 입장할 때 임신으로 불러온 배를 최대한 앞으로 내밀고 뒤뚱뒤뚱 걸어 들어가 동정표라도 얻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드디어 디데이가 밝았다. 우리는 운전대를 난생처음 잡았던 날만큼이나 떨리는 마음으로 자동차에 올라 킹 앤 퀸 카운티로 향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 둘은 계획한 포즈로, 그러니까 남편은 죄를 뉘우치고 있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 겸손하고도 통탄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한 손은 허리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날따라 평소보다 조금 더 불룩 해진듯한 배를 천천히 문지르며 법정에 입장해 떨리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교통법규 위반으로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우리 말고도 대 여섯 팀이 더 있었는데 첫 팀부터 하나같이 판사를 향해 마치 옆집 아저씨를 대하는 태도로 "하이."라는 가벼운 인사를 던지며 말문을 열더니 60마일로 달려야 할 곳에서 120마일로 달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이들조차도 자기들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그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잘못이 없고 그러니 그 벌금은 낼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누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주장을 편다 해도 판사는 딱 한 가지만 고려해서 벌금 감면 여부를 결정하는 듯했다는 것. 그 자리에는 벌금 티켓을 발부한 경찰관들도 출석해 있었는데 판사는 그들에게 지금 이 자리에 선 이가 티켓을 받을 당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협조적이었는지만을 묻더니 그에 대한 경찰관의 대답이 예스일 경우 벌금을 통 크게 팍팍 감면해 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우리는 친애하고 존경하옵는 판사님께 올리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장광설을 준비해 간 것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남편은 갑자기 친구처럼 Hi를 외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드라마나 영화 밖 세상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Your honor로 시작되는 가슴 아픈 사연을 그대로 읊을 수도 없어 고민하는 눈치더니 결국 후자를 택했는지 외워온 문장을 간신히 마무리했다.


그 자리의 민망함은 부디 잊기로 하자. 결론적으로는 법정에 간 덕분에 벌금을 처음의 60프로 수준으로까지 깎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깎아 보겠다고 정성 들여 대사와 포즈를 준비한 우리 둘의 모습은 지금 뒤돌아 생각해 봐도 우습고 짠하다.


여하튼 목표했던 대로 낯선 동네 법정 구경 잘했겠다 벌금도 감면되었겠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법정을 나섰다. 며칠 동안 이 시간을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남편을 위해 귀갓길 운전대는 내가 잡기로 했다. 그런데 법원 앞 도로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조금 전 법정에서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좌회전 차선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난, 차도 몇 대 없어 보이길래 3차선에서 1차선으로 무모하게 차선을 옮기고 말았다.

그 순간, 뒤에서 삐용삐용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당장 차를 세우라는 방송이 귓구멍을 후벼 팠다. 내가 하필이면 경찰차 앞으로 끼어든 것이었다. 아놔. 법원에 벌금 내고 나온 지 3분도 안 되었는데 또 벌금 러 들어가야 하나. 흥겹던 차 안의 분위기가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싸늘해진 가운데 차를 세우고 나타난 경찰관 아저씨가 운전석에 앉은 나의 불룩한 배를 쓱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번만 봐줄 테니 앞으로는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총총히 떠나갔다.


법정에서 동정표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 여행이가 엄마, 아빠를 도와주는구나. 고맙다, 고마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아가야. 우리... 교통 법규 잘 지키는 정말 좋은 부모가 될게.

그리고 다행히 그 결심은 여행이가 만으로 여덟 살이 된 오늘날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후유~


킹 앤 퀸 카운티의 킹 앤 퀸 법정에 다녀온 이후 교통 법규를 철저히 지키고 있는 우리는야, 좋은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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