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Oct 13. 2022

설탕과 크루즈의 도시를 추억하며

자메이카 팔머스를 수식하는 두 가지 기억

과거의 크루즈 여행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기항지는 팔머스(Falmouth) 이곳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자메이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인 1769년에 세워진 항구도시다. 팔머스 주변 지역은 이 나라를 대표하는 사탕수수 재배지였다고 하는데 그것을 서구로 이동시키는 창구 역할을 맡았던 팔머스는 1800년대에 이르러 호황을 누리게 된다. 오늘날까지 이 도시에 남아 있는 대형 건물은 대부분 설탕 산업으로 부를 거머쥔 이들이 살던 집이나 그들의 커뮤니티 시설이었다고 들었다.

아직도 설탕은 자메이카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라지만 지금의 팔머스는 과거에 비하면 그저 소박한 동네일 따름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난 2008년, 팔머스가 크루즈 기항지가 되었고 도시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단, 크루즈선이 정박하는 날들만.


팔머스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지금도 나는 그곳을 떠올리노라면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복잡한 마음이 되고 만다. 왜일까?


주변에는 온통 푸른 바다뿐이었는데 어느샌가 저 멀리 초록이 우거진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에너지가 전달되어오는 열대의 땅, 그곳은 팔머스였다.

배가 닻을 내리자 승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항구에는 크루즈 탑승자들만 출입이 허용되는 마켓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야자수며 붉은 노을, 그리고 바다가 그려진 화려한 유니폼을 똑같이 차려입은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고 있었다. 자메이카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직물부터 그 자리에서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상까지. 흥정하고 사고파는 이들로 마켓은 북적였다. 이국적인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잘 정돈된 풍경이 아쉬웠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반나절의 여유가 있었기에 이 도시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궁금해진 나와 남편은 발길 닿는 대로 팔머스의 이곳저곳을 걸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아담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도 없이 무작정 눈앞에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다.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면 되돌아 나와 그다음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 순간 동네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고파는 작은 시장이 나오고 새로운 골목으로 접어들라치면 이번에는 벽화가 화려한 주택가 골목길이 선물처럼 짠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다 무너져가는 버려진 건물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공터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곳에 잠시 앉아 쉬기도 했다. 그러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동네 아이들이 몰려나와 다 찢어진 공으로 신나게 축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 힘찬 발길질에 푹 빠져있는데 이번에는 염소 가족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한국에서 태어난 인간들과 자메이카가 고향인 염소들은 그렇게 서로를 관찰하다 멀어져 갔다.


목적 없이 동네를 헤매던 우리 앞에 스쿨School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건물이 나타났다. 자메이카의 학교는 어떻게 생겼나 궁금한 마음에 살짝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아저씨 한 명이 나왔다. 우리에게 안내를 해주겠다나 뭐라나. 슬쩍 보니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박물관처럼 전시품이 있을 리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설명할 게 있나 싶기는 했지만 워낙 열정적으로 안내를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더 이상 사양하기도 힘들고 해서 그 아저씨를 따라 학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여기는 교실입니다."


"이쪽은 운동장이고요."


눈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한마디로 쓸데없는 설명을 늘어놓던 아저씨가 급기야는 무슨 악보 같은 게 그려진 벽 앞으로 우릴 데려갔다. 그러더니 굉장히 진지한 눈빛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메이카의 국가였다. 가슴에 손까지 얹고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가 과도하게 근엄해 웃겨 죽겠는데 이 나라 국가는 또 왜 그리 긴지. 웃음이 터지려는 걸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까지 소환해가며 간신히 참고 있는데 드디어 노래를 마친 아저씨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우사인 볼트 알아요?"


내가 자메이카의 국가는 몰라도 인간 탄환, 우사인 볼트는 당연히 알지. 안다고 대답하니  여기가 바로 그가 다니던 학교라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네?????

우사인 볼트가 이 운동장에서 카리브해를 바라보며 훈련을 하고 쉬는 시간에는 저기 저, 그네를 타고 놀았다는 것이었다. 운동장은 학교 운동회를 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울퉁불퉁한 흙바닥이었고 그네는 너무나도 총천연색으로 칠해져 있어 그곳을 누비는 어린 우사인 볼트의 이미지가 잘 상상이 되지 않기는 했다. 그렇지만...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하니 어쩌면 아저씨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뭘까? 이 저항할 수 없는 거짓의 기운은?

이후에도 학교의 또 다른 교실이며 운동장의 나무 등에 대한 사족 같은 설명이 이어졌고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투어를 끝낸 아저씨는 우리를 학교 후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곳엔 자메이카 정부로부터 인증받은 기념품만을 팔고 있다는 매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별 거 없어 보였는데 아저씨 덕분에 몹시 흥미진진해져버린 학교 투어를 마치고 우리 부부는 동네를 조금 더 둘러보았다. 해변에 모여 놀던 아이들이 나와 남편을 보자마자 급하게 달려오더니 우리를 바라보며 묻지도 않은 자메이카의 역사를 달달 외기 시작했다. 알아듣지도 못할 속도로 빠르게 문장을 쏟아낸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다는 반짝이고 햇살마저 너무 찬란한데 우릴 향해 내미는 아이들의 손은 왜 이리 꾀죄죄한 것인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학교 투어를 하면서 웃음보가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건만 이번에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다. 그 메워지기 힘든 간극 때문일까? 자메이카 팔머스의 기억은 코믹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주변에는 온통 푸른 바다뿐이었는데 어느샌가 저 멀리 초록이 우거진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동네 아이들이 몰려나와 다 찢어진 공으로 신나게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여행 팁


팔머스(Falmouth)는 자메이카 북서부의 트렐로니 지역(Parish of Trelawny)에서 가장 큰 도시다. 1769년에 탄생한 이 항구도시의 이름은 당시 식민지 자메이카의 총독이었던 윌리엄 트렐로니(Sir William Trelawny)가 태어난 영국의 지명을 그대로 따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자메이카가 설탕 생산과 수출의 메카였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팔머스는 자메이카 전역에서 가장 분주하게 돌아가는 항구도시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바다 건너 영국으로 옮겨져 갈 설탕과 럼주를 생산하기 위해 흑인 노예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팔머스는 노예들이 비참한 환경에서 마치 짐짝처럼 다뤄지며 거래되는 곳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크루즈 여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여행비가 비쌀 것 같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만을 위한 여행이 아니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숙식비와 기항지 간의 이동 비용을 따로따로 계산해보면 그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크루즈 여행 비용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금세 알 수 있고 배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생각한다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어지는 것이 바로 이 크루즈 여행이다.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크루즈선 전체가 페스티벌 분위기로 탈바꿈하기도 하니 그런 시기를 노려 크루즈 여행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전 06화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아저씨를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