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앞에는 노트북 한 권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놓여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큼지막한 머그잔에 커피를 한 잔 가득 따라와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참이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사실은 이게 벌써 오늘의 두 잔째 커피다. 오래전 안중근 의사께서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셨던가? 나는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을 것만 같다.
이제는 커피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시지 못해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들은 하루에도 몇 잔이나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 음료가 이상하게 나에게만은 한 모금만으로도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니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그런데 그랬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이야기의 시작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와 남편은 미국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위치에 쇼핑몰이 하나 있었고 미국의 많은 쇼핑몰이 그러하듯 그곳에는 스타벅스(Starbucks)가 있었다. 집에서 워낙에 가까워 종종 들르긴 했으나 커피를 즐기지 않았던 나는 그곳에 갈 때면 차를 마시거나 아니면 커피를 마시는 상대방 앞에 멀뚱멀뚱 앉아있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부부에게 우리의 2세, 여행이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그날, 나는 동네 친구와 함께 같은 가게를 찾았다. 커피를 주문하는 친구 옆에서 할 일이 없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나의 눈에 카운터에 적힌 문구가 들어왔다.
<임산부도 커피 하루 한 잔은 괜찮습니다.>
지금 나한테 하는 이야기인가? 임산부도 커피 하루 한 잔은 괜찮다는데 마침 나도 임산부잖아? 어디 그럼 나도 한 잔?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여자의 몸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고 한다. 하나의 생명을 이 세상에 내어 놓는 큰 일을 하는 것이니 그것을 해내는 몸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 그런데 그 일이 나에게도 신기한 변화를 일으킨 게 분명했다. 임신 전까지만 해도 커피를 마시면 가슴이 너무 세게 뛰어 겁이 날 정도였는데 여행이를 품은 몸으로 마셔 본 커피는 와우! 이럴 수가. 그래, 이 맛이야!
그렇게 시작된 한 모금으로 인해 나의 1일 1 플러스알파 커피 인생이 시작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시애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포근한 러브 스토리는 당시 십 대 초반소녀였던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는데 나에겐 주인공이었던 샘(톰 행크스)과 애니(맥 라이언)가직접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시애틀이라는 동네에 가면 길거리에서 정말로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의 계절이 무수히 왔다 갔다. 내 기억 속에서 그 둘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갔지만 여전히 나는 시애틀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행이와 직접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우리 부부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둘만의 장거리 여행을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시애틀이었다.
꿈꿔오던 도시에 도착하던 날, 정말 오랜만에 기억의 저편에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떠올랐지만 톰 행크스랑 맥 라이언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기에대신 스타벅스 1호점을 만나러 다녀오기로 했다. 시애틀 주민들의 생활공간을 넘어 이제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 우리는 스타벅스 1호점이 이 시장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시장 한 귀퉁이에서 작게 시작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매장이 상당히 넓었고 유명세를 고려했을 때 이상하리만치 손님도 적었다. 게다가 1971년에 오픈한 가게치고는 내부도 상당히 현대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 리모델링을 한 건가? 우리의 본능은 계속해서 '무언가 이상해. 이상하다고!'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 구경을 하느라 이미 지친 터라 목이 너무나도 말랐고 한시라도 빨리 오리지널 스타벅스 커피를 맛보고도 싶었기에 줄을 오래 서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텀블러와 머그잔까지 샀다.
그러나 본능은 역시 무서운 것이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쉬이 가시질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는 다시 천천히 정보를 찾아보았다. 오래지 않아 우리 부부가 기념품을 한 아름 사고 커피까지 마시고 있는 지금 이곳은 스타벅스 1호점이 아니라 그 근처 길에 처음으로 들어선, 그러니까 그 길의 스타벅스 1호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럼 그렇지! 치밀하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에 푸하하 웃음을 터뜨린 나와 남편은 커피잔을 비우자마자 '진짜' 스타벅스 1호점이 있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도 다 추억이니 샀던 기념품을 굳이 반품하지는 않았다.
'진짜' 스타벅스 1호점은 오로지 테이크아웃만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봐도 그곳이 우리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게 앞에 늘어선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스타벅스 커피맛 이미 아는데 그거 한 잔 마시자고 정말 이 줄에 서야 하나,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영원처럼 느껴지는 기다림 끝에 우리는 '진짜' 스타벅스 1호점에서 다시 한번 커피와 기념품을 샀다. 커피 맛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기념품은 오리지널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레어템이었다.
가짜 스타벅스 1호점에서 구매해 몇 년 동안이나 사무실에 두고 사용하던 텀블러가 너무 오래되어 그랬는지 뚜껑을 닫는 부분이 부서져 버렸다. 쓸 만큼 쓴 낡은 물건이었지만 그걸 볼 때마다 엉뚱한 곳에 가서 신나게 커피를 마시고 기념품까지 샀던 우리 부부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제 몫을 해내지 못하는 물건이라 해도 쉽사리 내칠 수가 없어 버릴까 말까 한 달도 넘게 고민했더랬다. 휴직을 하면서 고장 난 텀블러까지 챙겨 오기는 어려워 그걸 버리고 말았는데 뒤돌아 생각하니 후회가 된다.
이제는 시애틀을 떠올리면 샘과 애나가 서로를 보듬던 풍경보다 나와 남편이 함께 하던 풍경이 더 먼저 떠오른다. 머리를 맞대고도 엉뚱한 곳을 찾아갔던 우리 둘은 부모가 된 지금까지도 종종 길을 헤맨다. 그것이 여행지에서의 길이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길이든. 그래도 아직 서로를 향해 머리를 기울이고 옳은 방향을함께 궁리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가 다시 함께 시애틀에 가게 된다면 이번에도 엉뚱한 스타벅스 1호점과 '진짜' 스타벅스 1호점에 다녀오고 싶다. 양쪽 모두에서 오리지널 로고가 새겨진 텀블러를 사서 아주 오래오래 사용한 다음 사용하다가 부서져도 절대 절대 버리지 않고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다.
진짜 스타벅스 1호점, 그리고 가짜 스타벅스 1호점에서 나의 이름이 쓰인 컵을 들고 있는 남편의 손
여행 팁
•'진짜' 스타벅스 1호점(The Pike Place Startbucks Store/ Original Starbuc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