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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12. 2022

돈봉투 전달 대작전

아일랜드 소도시 일일 버스투어

사촌 언니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을 방문했던 해, 우리 가족은 언니의 집에 머물면서 언니네 동네를 산책하고 언니네 가족이 종종 간다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심지어 언니의 직장에까지 따라가는 등 언니에 빙의한 더블린에서의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며칠이 흘렀고 우리 부부는 기왕이면 아일랜드까지 온 김에 이 나라의 소도시는 어떻게 생겼나 구경하러 다녀오자는 데 의기투합을 했다. 사실, 서울이나 런던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더블린도 이미 충분히 작은 도시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만났던 더 한적한 마을과 아일랜드의 자연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 애초부터 특별한 목적지 같은 것은 없었으므로 우리는 지도를 대충 훑어보다가 더블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 한 군데를 골랐다. 그렇게 우리 셋은 아일랜드 동해안의 더블린을 출발해 북서쪽 해안가의 도니골 타운(Donegal Town)으로 향하게 되었다.


직행인 줄 알았는데 오는 길에 몇 군데나 들러 들러 도착한 버스는  시간 만에 우리를 도니골 타운 광장에 내려주었다. 넓을 광이라는 글자가 민망할 정도로 작은 그곳이 도니골 타운에서는 가장 큰 광장이라 했고 우리는 그 바로 앞 호텔에 짐을 풀고 동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도니골 타운을 둘러보고 나니 이번에는 또 그 주변, 더 시골 마을까지 둘러보고 싶어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관광안내소에서 일일투어상품을 추천받아 거기에 참가해보기로 했다. 내야 할 돈은 한시라도 빨리 내버리는 게 속이 편해서 예약하는 김에 투어 참가비까지 내려고 했더니 관광안내소 직원 왈, 투어 버스 운전기사 겸 가이드에게 직접 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라니 그러는 수밖에.


다음 날, 우리는 약속한 시간, 약속한 장소에서 투어버스를 기다렸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버스는 20인승이 될까 말까 한 미니버스였는데 그 안에서 싱글벙글 선한 인상을 지닌 분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만나자마자 참가비를 내미는 우리에게 아저씨는 일단 여행 잘하고 돈은 이따 투어가 끝난 다음에 달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돈을 못 낸 우리 가족은 일단 버스에 올랐다. 관광객 몇 팀을 태운 작은 버스는 그렇게 아일랜드의 시골 풍경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상상 속 아일랜드가 실재하는 것이 되어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갔다. 때는 봄이 한창인 5월이었건만 아일랜드의 풍경은 통통 튀는 찬란함보다는 안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차분함에 가까웠다. 하필이면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라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글렌비 성(Glenveagh Castle)이었다. 글렌비 국립공원 안에 있는 이 성은 1867년부터 1873년 사이, 존 조지 아데어(Captain John George Adair)라는 인물이 지은 것이라 했다. 아일랜드와 미국에서 사업을 통해 큰돈을 번 그는 부인과 함께 글렌비 성을 지었는데 주변 조경을 관리할 목적에서였는지 근처에 살던 수많은 소작인들을 기근이 심각하던 시기에 거리로 내몰아 오랫동안 악명 높은 인물로 회자되었다고 한다.

원주인은 그토록 악명이 높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은 아름다웠다. 산과 호수 그리고 협

곡으로 둘러싸인 풍경 안에 홀로 자리한 글렌비 성은 주변의 풍경 가운데 녹아들어 있었고 오래된 성과 아데어 부인이 열심히 가꿨다는 정원의 아름다움은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었다.


아직 만으로 한 살이 되지 않았던 당시의 여행이는 유모차에 앉아 엄마, 아빠와 함께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실, 무언가를 보고 있었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이기는 다. 그렇지만 똘똘한 눈알을 굴리다 다음 순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바라보던 부모의 기억은 다행히도 또렷해 이렇게 훗날 글로도 남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나의 부모가 내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내 어린 날의 추억들을 간직해 주고 계신 것처럼 나도 내 아이가 기억하지 못할 아이추억들을 오래도록 보듬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글렌비 성 이후에도 몇 곳을 더 둘러본 후 투어버스는 밤이 내려앉은 시간, 도니골 타운으로 되돌아왔다. 하루를 함께 보낸 이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오늘의 여행을 책임져 준 분께 인사를 보내며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든 여행이를 안은 나와 유모차를 접어 쥔 남편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방에 도착하자마자 아뿔싸! 우리 둘 다 투어 참가비 내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하게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 보았지만 버스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황. 급한 마음에 호텔 직원분께 조금 전 이 앞에서 떠난 투어 회사에 대해 아냐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불편한 마음으로 그날 밤을 넘기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린 관광안내소를 다시 찾아가 투어를 추천해주신 분을 찾았다. 같은 질문에 대한 그분의 대답도 '나는 아는 바가 없소.'였다. 그러면서 잘 되었다면서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내지 말라는 게 아닌가. 선물 준 사람이 선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내가 스스로 선물로 받기는 좀 꺼림칙해서 돈을 봉투에 넣어 직원분께 맡기려고 했더니 그건 또 전달해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우리가 타야 할 더블린행 시외버스는 곧 출발하는데 투어 참가비를 못 내고 가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호텔로 다시 달려가 봉투에 든 돈을 그곳에 남기고 왔다. 투어버스 운전사 아저씨에게 꼭꼭꼭 전해 달라는 말과 함께.


그게 벌써 7년 전 일이다. 그때 우리가 남기고 온 돈봉투는 잘 전달되었을까? 왠지 그게 아직도 우리가 머물던 호텔 로비 서랍에 그대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이겠지?


상상 속 아일랜드가 실재하는 것이 되어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갔다.

여행 팁


글렌비 성(Glenveagh Castle)은 아일랜드 북서쪽 끝자락, 비 호수(Lough Beagh)를 바라보는 위치에 지어진 성이다. 19세기 말, 존 조지 아데어(Captain John George Adair)가 그의 미국인 부인인 코넬리아(Cornelia Adair)와 함께 짓고 가꾸었다고 한다. 아데어 부부 사후, 성은 쇠퇴의 길을 걷기도 했다가 미국의 고고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이기도 했던 아서 킹슬리 포터(Arthur Kingsley Porter)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간다. 이후 성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헨리 밀레니(Henry Mcllhenny)를 거쳐 아일랜드 정부로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현재는 글렌비 국립공원의 일부로서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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