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면 그리워지는 것들이 있다. 도톰하게 짠 목도리와 장갑, 뺨이 얼얼할 정도로 추운 바깥에서도 호호 불어가며 먹어야 했던 떡볶이와 오뎅 국물 같은 것들. 아! 그리고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보내는 시간도 빼놓을 순 없지!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면 나의 마음은 온천으로 온천으로 달려간다.
한국에서 멀지 않은 일본에는 지역마다 특색 있는 온천이 많아 새로운 곳을 찾아가며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규슈처럼 이미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들은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좋은 곳들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에 비해 인프라도 부족하고 덜 알려졌지만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들이 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찾아갈 온천마을처럼.
일본 혼슈 기후현의 다카야마(高山市)는 작은 교토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전통이 살아있는 도시다. 그곳에서 차로 약 1시간가량을 달리면 일본의 북알프스로 알려진 장엄한 산악지대가 나오는데 그 안에 온천마을들이 자리하고 있다. 오쿠히다 온천마을(奥飛騨温泉郷)은 다섯 개의 온천이 있는 지역을 의미하고 그것은 각각 히라유(平湯), 신 히라유(新平湯), 후쿠지(福地), 도치오(栃尾), 신호다카(新穂高) 온천마을이다. 규슈 지역의 오랜 역사를 지닌 곳들에 비하면 개발이 늦은 편이나 산행을 위해 북알프스를 방문한 이들이 오가는 길에 묵어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곳이란다. 이들 마을에서 솟아 나오는 온수의 용출량은 규슈의 벳부와 유후인 다음 갈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알려져 있다.
북알프스 구경을 마친 우리 가족은 히라유 온천마을로 향했다. 이 부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온천 밀집지역이라고는 하나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아 걸어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산, 그것도 일본 국내외로부터 수많은 산행객들을 불러 모르는 산악지대에 위치한 온천인만큼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 노천온천(露天ぶろ)이 특히나 유명하다는 이야기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뜨끈뜨끈한 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앉아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싼 산을 바라보노라면 온갖 근심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는데,정말 그럴까?
그런데 사실 나에게는 노천 온천에 몸을 아무리 오래 담가도 사라지지 않는 근심과 걱정이 있기는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황 파악이 제법 빠른 여행이는 일본을 여행할 때면 알아서 목소리를 낮추곤 했었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아, 이 사람들 심상치 않구나, 내가 여기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구나라는 게 느껴졌나 보지? 특히 료칸에 가면 귀동냥으로 배운 곤니찌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사요나라를 주워섬겨가며 애어른처럼 얌전히 잘 지내는 아이가 바로 여행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히라유 료칸의 노천온천에서만은 제 목청껏 이야기하고 신명 나게 노래까지 부르며 요란하게 놀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묵었던 작은 료칸에 그날따라 손님이 우리 가족뿐이었고 당연히 온천에서도 우리 이외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여행이의 상황 파악 능력은 탁월했다. 이제야 살겠네 싶은 표정으로 신나게 물놀이를 하던 여행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눈은 왜 자꾸만 주변을 살피고 나의 마음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쪼그라들던지. 그래서 그 좋다는온천물에 손가락, 발가락이 쪼글쪼글 해질 때까지 몸을 담그고도 몸의 피로는 풀 수 있었지만 마음의 피로도는 어쩐지 조금 더 높아진 상태로 온천욕을 마치게 되었다.
그렇게 물놀이인지 온천욕인지 모를 것을 하느라 계획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 보낸 우리 가족은 물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여행이를 도망가는 미꾸라지 국자로 퍼내듯간신히건져낸후 늦은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관광지라고는 해도 오가는 이 많지 않은 산골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길은 한적했다.오가는 이도 별로 없고 몇 개 없던 가게들도 이미 문을 닫아 건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셋은 마을 한 바퀴를 다 돈 후에야 겨우 조그마한 선술집 같은 가게 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이럴 수가! 술 파는 가게에 분명 주인도 있고 손님들도 있는데 다들 개미새끼만 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는 게 아닌가. 옆 테이블에 앉은 중국인 4인 가족, 건너편 바 테이블에 앉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서양인 커플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너무나도 조용히 예의 바르게 속삭이며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있었다. 심지어 주인아저씨조차 진공상태에서 요리를 하는 듯 도마에 칼질을 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국인 3인 가족도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혀 소리라도 나면 어쩌나 벌벌 떨어가며 조심스레 라멘과 안주를 집어 먹고 맥주를 마시다가 나도 모르게 꿀꺽 소리를 내면 어쩌지? 테이블에 잔 내려놓는 소리라도 난다면? 그렇게 신경을 써가며 조용히 맥주를 마셨다. 뜨끈한 온천물에 목욕을 하고 분명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만 같다. 아까 그 노천온천에서 놀던 아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다시 일본 모드로 돌아간 여행이도 여기에서는 엄마, 아빠한테 뭘 많이 물어보면 안 되겠구나라는 계산이 나왔는지 서가에서 빼온 책을 살살 넘겨가며 조용히 밥을 씹어 먹고 있다.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저녁을 마친 우리 셋은 혹시나 계산하다 동전을 놓쳐 땡그랑 소리라도 나면 안 되니 지갑을 굳게 쥐고 셈을 치른 후 가게를 나섰다. 하이고~ 가게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북알프스의 밤바람이 콧구멍으로, 가슴팍으로 속 시원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다음번엔 좀 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나라로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다시금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이 가까워 오니 하루 온종일 속삭여도 좋으니까 다시 그때 그 온천으로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사람의 마음이란!
일본 모드 ON!
가게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북알프스의 밤바람이 콧구멍으로, 가슴팍으로 속 시원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행 팁
•오쿠히다 온천마을(奥飛騨温泉郷, 오쿠히다온센고)은 일본 혼슈의 중부지방, 기후현 산악지대에 자리한 다섯 개의 온천이 있는 지역을 의미다. 히라유(平湯), 신 히라유(新平湯), 후쿠지(福地), 도치오(栃尾), 신호다카(新穂高), 이상 다섯 군데의 온천마을 중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역사도 긴 곳은 히라유란다. 가장 크다고는 해도 마을 전체를 걸어서 둘러보는 것도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다. 히라유는 일본 북알프스를 방문하는 이들이 오가는 길에 쉬어가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작은 마을의 소박한 료칸에서 하룻밤 묵으며 노천온천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다만 마을에 도착하기 전, 인적이 드문 숲이 있으면 거기에다 대고 소리라도 실컷 지르고 오길 바란다. 마을에 도착하면 찍소리도 내기 힘들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