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Oct 12. 2022

그렇게 부부가 된다

몰디브의 교훈

나는 당첨운이 좋은 편이었다. 크고 작은 이벤트에서 무언가에 당첨된 적은 셀 수도 없이 많고 가위 바위 보를 하더라도 상품이 걸리는 순간 승률은 꽤나 높아진다. 하지만 결단코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공짜 선물을 받게 되다니!


나와 남편은 부부의 연을 맺은 날로부터 일 년 반쯤 지난 어느 날 몰디브(Republic of Maldives)에 다녀왔다. 인도양에 자리한 이 나라는 대략 1200개에 이르는 산호섬과 환초(環礁)로 이루어진 섬들의 나라다. 산호충의 번식에 따라 산호초의 숫자도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몰디브 정부조차 자기네 나라에 정확히 몇 개의 섬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섬이 천 개도 넘게 있는 마당에 정확한 개수가 뭐 그리 중요하랴. 마치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몰디브의 물빛은 오로지 한 가지 색깔만으로는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신비로운 빛깔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물빛으로 대표되는 몰디브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기 위해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이미 이 섬들의 나라를 방문하고 있지 않은가. 관광객들보다 먼저 귀신같이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기업들 덕분에 고급 리조트들도 많아 몰디브는 호캉스를 즐기기 제격인 여행지가 된 지 오래다.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대한항공이 스리랑카 콜롬보와 몰디브 말레 신규 취항을 기념하며 진행한 여행수기 공모전에서 내가 덜컥 1등으로 선정되어 스리랑카와 몰디브를 둘러보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여행이 고픈 참에 1등을 하면 공짜로 여행을 보내준다는 광고를 보고는 눈이 홱 뒤집혀 정성으로 썼던 글이 먹혀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섬으로 향했다. 경제적 부담도 덜었겠다, 마침 아직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지지도 않은 신혼이겠다, 우리의 여행은 온전히 로맨틱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햇살이 거짓말처럼 맑고 투명한 데다 파랗기까지 한 바다 위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머물던 리조트는 길쭉한 섬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고 바닷가에 자리 잡은 숙소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 안에서 카약이나 스노클링 같은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가 있었다. 기회가 있는데 즐기지 않을 이유는 없지. 그래서 우리 둘도 카약을 타고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수영도 잘 못하고 그래서 스노클링은 꿈도 못 꾸는 우리 눈에는 물속에 몸을 담그지 않아도 되는 카약이 제일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배를 내준 직원은 간단한 안전수칙을 알려주면서 "저 끝에 있는 모래톱을 벗어나 큰 바다로 나가면 절대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모래톱은 정말로 먼 곳에 있었고 일부러 그곳을 노리고 나아가지 않고서야 큰 바다로 나갈 일은 절대로 없어 보였으므로 우리는 흔쾌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리고 탑승 기념사진까지 몇 장이나 찍은 후 배에 올라 타 신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우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구령까지 붙여 가며 신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손발이 척척 맞았는지 나와 남편이 탄 카약은 생각보다 쉽게 앞으로 쑥쑥 나아갔다. 배를 타기 전에는 날도 더운데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주저했었는데 바다를 시원하게 가르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화끈하게 이동하는 배에 앉아 있노라니 이마를 스치는 바람마저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신이 났다. 아마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나는 이걸 타고 하늘과 바다와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오손도손 이번 여행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다정하게 대화하는 그림을 상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밖으로는 절대로 벗어나지 말라던 모래톱은 어느새 저만치 뒤에 있었고 그마저 점점 더 먼 곳으로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조류, 조류 때문이었다. 퍼뜩 정신이 든 우리는 다시금 힘을 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을 외치며 노를 젓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의 "왼쪽! 오른쪽!"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필사적인 무언가가 배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둘 다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의 힘은 과연 무서운 것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카약은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점점 더 먼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노를 젓는 나와 남편의 얼굴과 온몸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아지경이 되어 노를 저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던 순간, 우리는 마침내 희희낙락하며 처음 카약을 띄우던 장소로 되돌아왔다. 배의 바닥이 모래에 닿았나 싶은 찰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얕은 물로 뛰어내린 후 힘을 합쳐 선체를 해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곤 전광석화처럼 노와 구명재킷을 반납한 후 가장 가까운 파라솔 밑에 드러누웠다. 조금 숨을 돌린 후 시계를 보니 우리가 카약에 앉아 있던 시간은 불과 20여 분. 비록 내가 꿈꾸던 다정한 부부간의 대화는 택도 없이 우리가 나눈 말이라고는 왼쪽, 오른쪽 밖에는 없었지만 마치 억만년처럼 느껴졌던 시간 동안 먼바다로 밀려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 속에서 힘을 합해 탈출하며 우리는 조금 더 '진짜 부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커플들의 로망이라는 몰디브를 공짜로 다녀온 후, 나에게는 이렇다 할 당첨 소식이 없다. 결혼 전보다 이상하게 당첨운이 떨어진 것 같다는 나의 투정 아닌 투정에 남편이 답했다. 자기를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이라서 거기에 유미의 당첨운을 다 써버린 것 같다나 뭐라나. 제 입으로 뻔뻔하게 그런 소릴 하는 게 웃겨서 그 자리에서는 수긍해 주지 않았지만 몰디브에서의 추억을 떠올려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우리가 올라 탄 인생이라는 배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더 먼바다로 떠밀려 가는 날도 있겠지. 그럴 때 오로지 우리 만이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는 것, 힘을 합쳐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만 우리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어쩌면 그날 몰디브의 바다에서 우리는 그런 교훈을 얻고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햇살이 거짓말처럼 맑고 투명한 데다 파랗기까지 한 바다 위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이전 04화 카트만두에서 온 편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