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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13. 2022

꿈꿔 왔던 그런 날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에 다녀온 여행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욕실로 달려들어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비누로 손을 씻은 아이는 곧이어 장난감이 가득한 자기 방으로 내달리더니 바닥에 앉아 놀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저것들을 갖고 놀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싶은 생각에 나는 옷부터 갈아입으라는 잔소리를 되삼키고는 아이를 그대로 둔 채 부엌으로 향했다. 여행이의 가방에서 도시락통을 꺼내 설거지를 했다. 그리곤 간식을 준비해서 노는 소리 요란한 여행이의 방으로 되돌아갔는데 아이는 아직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마스크를 쓴 모습 그대로. 그 답답한 걸 왜 벗지도 않고 놀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한다는 말이, 자기는 이제 마스크가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껏 그걸 쓰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는 거였다. KF94 마스크였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며 드라마를 보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는 나날이 끝나긴 할 것인가. 요컨대 우리가 마스크를 벗어 살아갈 날이라는 것이 과연 다시 오기는 오는 것일까. 그런 서글픈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던 것 같다.


지난 2022년 3월 1일, 여행이가 다니는 학교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거기엔 그날부터 실외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필수가 아니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마냥 기뻐만 하기에는 불안함 마음이 여전했지만 나는 여행이에게 이제 체육시간이나 바깥 활동을 하는 시간에는 마스크를 꼭 벗으라고 말해주었다. 여름이면 실외 온도가 섭씨 50도를 육박하는 두바이의 더위 속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못한 채 땀을 뻘뻘 흘리던 내 아이. 그 모습이 눈에 선해 지난 일을 곱씹으면서도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이제 그런 날들과도 진짜 안녕을 고하게 되는 것일까? 덩달아 나도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지내기 시작했다. 지난 일 년 남짓 등하교 시간마다 만나오던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입과 코가 온전히 달린 얼굴들을 처음으로 마주하고는 마치 낯선 사이처럼 새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지만 그날은 마치 불꽃이 팡팡 터지는 축제날 같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우리는 가족은 내친김에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떠나는 유럽 여행이었다. 한때 코로나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된 탓에 전 세계에 공포의 이름으로 회자되던 그 나라는 어느새 팬데믹 전 일상을 대부분 회복한 듯 보였다.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외는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실내 공간에서도 마스크를 더 이상 의무적으로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이탈리아에서 나는 2년 반 전의 세상이 베풀던 것과 비슷한 결을 지닌 자유를 조심스레 만끽하고 돌아왔다.


그 여행 중 며칠을 르네상스의 중심지이자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라는 피렌체(Firenze, Florence)에서 보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즐길 수 있다는 곳에도 다녀왔다. 아직도 중세의 모습이 선명한 시가지가 내 발아래 깔린 카펫처럼 내려다보이는 언덕. 그곳을 오르는 길이 마냥 쉽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길 끝에서 만난 풍경이라니!


만약 마스크를 썼었대도 의미가 없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곳에 우리 셋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끼어 앉아 해가 지는 풍경을 감상했다. 사람들의 손에는 와인이며 맥주가 들려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네모난 마스크 대신 동그란 미소가 걸려있었다. 맨얼굴을 드러낸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 아, 그것은 어쩌면 그날의 붉었던 일몰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을까. 이제와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날들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날들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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