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 라이프

by 여행하는가족

바다와 나

"아, 아. 이유미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유미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보호자 되시는 분은 지금 바로 OO경찰서로 와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 여름 우리 가족은 대천해수욕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나 혼자 숙소 앞 해변으로 나갔던 아침이 생각난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만화 속 주인공이 입는 보석 달린 드레스처럼 바다는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이상한 일은,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얼마 후 뒤돌아보니 거기에 응당 있어야 할 우리 가족의 숙소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 건물에 발이 달려 도망쳤을 리는 없으니 내가 바다에 정신이 팔려 자리를 이동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 아무튼 덜컥 겁이 난 나는, 사라진 첫째 딸을 기다리고 있을 내 부모를 찾기 위해 주변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돌아다녀도 가족은 물론 눈에 익은 건물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기적은, 내가 엄마, 아빠를 목 놓아 부르며 울고 있을 때 일어났다.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던 아저씨가 부모님을 찾아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분은 무려 대천해수욕장 경찰서 소속 경찰관! 직업 정신 투철한 경찰 아저씨 덕분에 나는 미아가 될뻔했던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은, 이럴 수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말도 안 돼, 내가 다시 한번 미아가 될 뻔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 또 길을 잃고 바닷가를 헤매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금 엄마, 아빠를 찾다가 접어든 골목에서 같은 곳으로 휴가를 오셨던 아빠의 친구 가족을 우연히 만났던 순간만은 아직까지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나 자신이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의 어느 여름날, 인파로 바글거리는 그 바다를 앞에 두고 절망과 안도를 넘나드는 롤러코스터를 탔을 내 젊은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그나저나 나와 바다와의 인연이 얼마나 특별한지 강조하려고 꺼낸 이야기인데 쓰고 보니 일단 부모님께 사과부터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바다에 살어리랏다

나는 충청남도 내륙지방의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런 나에게 바다는 TV나 책, 또는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휴가지에서나 만날 수 있는 색다른 공간이었다. 자주 접할 수 없는 곳이다 보니 마주할 때마다 바다에 대한 로망이 점점 커졌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풍경 속에서 살아보리라는 희망까지 품게 되었다. 당장은 나도 남편도 직장이 있는 서울을 떠나기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아마도 우리 둘 다 퇴직을 하고 우리의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쯤이라면 정말로 바닷가에서 함께 살아볼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데 누가 그랬더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두바이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나의 오랜 꿈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현실이 되었다.


두바이에는 다양한 해변 풍경이 존재한다.


두바이의 바다, 두바이의 해변

두바이라고 하면 흔히들 사막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나도 그랬었다. 하지만 여기가 어떤 곳인가? 한때는 바다진주조개잡이가 주요 소득원이기도 했던 동네가 아니던가. 그렇다.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두바이는 바다와 면한 고장으로, 긴 해안선을 따라 아름다운 해변이 늘어선 풍경이 일상인 도시다. 호텔이나 아파트가 관리하는 프라이빗 비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개방된 해변도 많다. 그렇기에 이 도시에서는 누구나 공평하게 바다를 즐기며 살아갈 수가 있다. 게다가 1년 365일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날씨인 까닭에 엄밀히 말하자면 두바이 바닷가에는 비수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 물론 절절 끓는 여름에는 한낮을 피해 이른 아침이나 오후 늦은 시간에 바다를 즐겨야 하지만.


두바이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해변에서 보내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 약속을 잡기도 하고 내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놀러 가기도 한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에는 혼자 일거리나 책을 싸 들고 바다가 보이는 곳을 찾기도 한다.


팜 주메이라에서 바라본 두바이 다운타운 풍경. 안개 사이로 저 멀리 부르즈 할리파가 보인다.
세계 최초 7성급 호텔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버즈 알 아랍 주변의 해변. 고급 호텔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관람차인 아인 두바이가 있는 해변 풍경
각종 해양 액티비티로 늘 북적이는 두바이 카이트 비치


애정을 가지고 오래오래 바라보다 보니 두바이의 해변에는 두바이다운 풍경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버즈 알 아랍 같은 랜드마크들과 아랍에미리트의 전통미를 살린 고급 호텔들, 그리고 모스크 등이 어우러진 풍경은 두바이의 해변 풍경을 두바이답게 만든다. 관광도시로 개발되고 발전해 온 곳인 만큼 해변에도 방문객들의 편의를 고려한 시설들이 아주 잘 마련되어 있다. 바닷가 풍경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할 수 있는 트랙이 있는 것은 기본, 해변 가까이에는 벤치며 화장실, 카페, 레스토랑, 어린이 놀이 시설 등도 많다. 청소 상태는 또 어찌나 훌륭한지 사람 많은 해변에서도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 보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심지어는 모래까지 빗자루로 쓸고 사람의 손이 닿는 곳들을 끊임없이 걸레질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흘린 땀의 결과이겠지만.


두바이의 바다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맑고 깨끗했다.
바닷가에 자리한 아이들의 놀이 공간


비치 라이프

바다 가까이로 이사를 하고 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나를 둘러싼 환경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 방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저것이 바다라니, 건물 밖으로 나가서 조금만 걸으면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 위를 맨발로 밟고 바닷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두바이에 온 이래 나는 새벽에 눈을 뜨는 습관이 생겼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침잠이 없어진 것도 이유겠지만 이른 시간에 일어났을 때만 만끽할 수 있는 기쁨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나는, 내 곁을 떠나기 싫어하는 잠을 천천히 떼어내며 오른쪽으로 돌아눕는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창문이 있고 그 너머로는 아침의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고요한 바다도 잠에서 덜 깬 듯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다. 하지만 곧이어 저 먼바다 끝에서 손톱 모양으로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천천히, 그러나 뒤돌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해는, 이제는 빨갛고 동그란 구슬이 되어 수면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해가 바다와 멀어질수록 주변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바다 위로는 붉은 해의 길이 길게 길게 뻗어나간다. 어느새 완전히 잠이 깬 나는 창문 가까이 바투 다가앉는다. 그리고는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화려한 쇼를 감상하며 감탄사를 내뱉고 마는 것이다.


바닷가에 살기 시작하고 나서야 바다의 색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매일이 다르고, 매시간이 다르고, 매분 매초가 달랐다. 바다는 주변의 풍경이나 그날의 날씨뿐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상태까지도 예민하게 느끼며 제 생김새를 바꾸는 생물과도 같았다. 내일의 바다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올까? 나는, 두바이의 바다가 나에게 보여줄 변신을 마음껏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바닷가에 살기 시작하고 나서야 바다의 색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고처] 브릭스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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