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하나의 존재는 이 세상과 작별할 때 그것이 지니고 있던 가장 귀한 것을 남기고 떠난다. 호랑이에겐 가죽이 그러하듯 사람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은 이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속담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아, 물론 가죽도 이름도 다 사람이 꼽은 가장 귀한 것이긴 하다. 호랑이가 이 생각에 수긍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이름은 단순히 나와 다른 이를 구분 짓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게 분명하다. 이름에는, 그 주인의 삶이 담겨 있다.
이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명(兒名)에 대해 들어본 독자들도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신분과 관계없이 대다수가 갖고 있었다던 아명은 글자 그대로 어린이(兒) 시절에 불리는 이름(名)을 뜻하며 이는 정식 이름과는 다른 것으로 아이가 자라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아명을 짓는 데에는 일종의 규칙 같은 게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일부러 비천한 단어를 선택해 짓는 것이었다. 천하게 불리는 이에게는 악귀 같은 존재들조차 피해 가느라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방법이라 한다. 옛날에는 호랑이 같은 짐승에게 물려가 죽거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 저세상으로 가는 일도 잦았을 터. 그러니 개똥이나 소똥이 처럼, 갓 태어난 제 자식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심하게 만들던 아명들이 사실은, 내 속으로 품어 낳은 아이가 험한 꼴 당하지 않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만을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도야지(돼지)'라는 아명을 지녔던 황희 정승과 아명이 '개똥이' 였던 고종 황제. 갑자기 이들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이를 향한 정성스러운 부모의 마음은 아명을 지어주던 조상들이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부모들이나 매한가지다.
언젠가부터 태명(胎名)을 짓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태명은 모체의 자궁 안에서 보내는 약 열 달에 이르는 기간 동안 태아를 부르는 이름. 정식 이름은 이변이 없는 한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부터 평생 동안 그 이름의 주인과 함께 할 것이기에 정하는 데 고민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것에 비하면 스쳐 지나가는 이름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태명을 짓는 일 또한 다르지 않다고생각한다. 마치 실수로 떨어뜨린 0.1mm짜리 심을 가진 볼펜이 찍어 만든 점처럼 작디작은 존재가 키는 50cm요 몸무게는 3kg 남짓이나 되는 제법 존재감 있는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동안의 삶이 태명 안에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아이의 태명은 여행이었다.사실 흔한 태명은 아니다. 지금에서야 우리 가족의 입에는 찰떡처럼 붙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름이 되었지만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나조차도 처음 며칠간은 "여행아~ 여행아."라고 소리 내어 부를 때마다 어색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이제야 밝히지만, 사실 남편이 처음에는 이 태명에 반대했었기 때문에 남편 앞에서는 어색하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뭐라고? 어색하다고? 난 하나도 안 그런데~ 발음도 입에 착착 붙잖아~).
하지만 나는 정식 이름처럼 태명에도 삶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태명의 주인이 되는 인간의 삶이 그 이름이 지닌 메시지를 따라간다고도 믿고 있다. 그렇기에 여행이 만큼 우리의 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태명은 없다고 확신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하던 중에 새로운 가족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와 남편이 즐기는 공통의 취미 중 하나도 다름 아닌 여행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아이도 엄마, 아빠와 함께 이 아름다운 세상을 여행처럼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이가 가질 첫 이름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과연! 수시로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던 우리 부부는 내가 임신을 한 후로도 여행을 이어갔는데,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온 만삭 때까지도 취미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제 태명처럼, 내 뱃속에서 늘 잘 먹고 잘 움직이며 우리와 함께 세상 구경을 즐겨준 여행이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홉 살에서 열 살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첫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즐기던 여행을 지금까지도 여전히 좋아하는, 삶의 즐거움을 아는 아이로 잘 자라고 있다.
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여행이는 실제로도 여행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둘째에게는 어떤 태명을 지어주면 좋을까? 다시 한번 즐거운 고민에 휩싸였다. 지난번에는 나와 남편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첫째의 태명을 고민했었다면 이번에는 우리 부부에 여행이까지 합세해 셋이서 함께 의견을 나눴다.
나는 내친김에 여행이에게 태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아명에 대해서까지 알게 해주고 싶은 욕심에 우리네 조상들이 자녀들에게 지어주었던 개똥이, 소똥이, 말똥이 같은 재미있는 아명에 대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아이는 제 동생이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바랐던 것일까? 아뿔싸... 동생의 태명을 개똥이로 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행아, 네 의도는 잘 알겠어. 그렇지만 엄마는 똥 자 붙은 이름을 다정하게 부를 자신이 없단다.
어쩌다 보니 첫째도 둘째도 우리 가족이 한국을 떠나 지내는 동안 찾아왔다. 첫째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머물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리고 둘째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삶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친구가 나에게, 앞으로 십 년쯤 후에 내가 또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 된다면 혹시 거기에서 셋째가 태어나는 거 아니냐는 말을 건네기도 했는데, 친구야, 네가 내 친구라면 그거 농담 맞지? 사십 대 중반에 둘째까지는 내가 어떻게 해보겠지만 오십 대 중반에 셋째까지는 무리란다. 그러니 이제 셋째 이야기는 잊고, 일단 현재의 상황에 집중해 보기로 할게.
나는 어릴 적부터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언젠가 둘 다 은퇴를 하고 난 이후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얻어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런데 뜻이 있으면 길도 반드시 있다는 진리대로 우리는 그 꿈을 두바이에서 이루게 되었다.
해변에 자리 잡은 집에서 우리 가족은 매 순간 표정을 달리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 바다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던지고 강렬한 햇살이 물러난 시간이면 해변으로 나가 맨발로 모래 위를 걷기도 한다. 어떤 날의 바다는 몹시도 잔잔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수시로 들고 나는 잔물결 너머 바닷속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존재들이 제 삶을 바쁘게 살아내고 있다. 또 다른 날의 바다는 세찬 파도와 함께 하는데 그럴 때면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게느껴지기도 한다.
둘째의 태명을 놓고 우리 가족은 며칠 동안이나 의견을 나누었다. 개똥이를 비롯한 많은 태명이 후보에 올랐다.그리고논의 끝에 우리는 둘째를 '바다'라 부르기로 했다. 두바이에서의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의 곁을 지켜주었던 것이 바다였기에. 덧붙여 아이가 바다처럼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역동적인 흥미로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고 싶기도 했으니까. '바다야~ 바다야~.' 조그만 목소리로 뱃속의 둘째를 부를 때마다 나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통통통 귀엽게 내 몸을 건드리는 바다의 물결을 떠올린다. 그러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임신 초기에는 나에게 기쁨과 더불어 두려움까지 안겨주었던 바다가 임신 20주 차를 지나고 있는 지금은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태동은 임신 20주 차 즈음부터 느껴지기 시작한다지만 나는 그보다 조금 이른 17주 차에 접어들면서부터 내 안에서 움직이는 바다의 존재를 느껴오고 있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 작은 몸짓이 주는 안도감을 즐기며 나는 지금, 창 밖으로 펼쳐지는 두바이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를 찾아온 것은 여행이와 바다로구나.여행과 바다, 혹은 바다 여행. 어느 순서로 불러도 그저 예쁘고 마냥 사랑스럽다.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항로를 여행하며 재미와 행복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태명 그대로, 너희의 삶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기를 기도하고 있단다. 나중 나중에 너희도 부모가 되는 날, 각자의 아이들에게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아 예쁜 태명을 지어주기를 바라. 어떤 태명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날지 엄마, 아빠는 벌써부터 너무너무 궁금해.
'여행이'가 두바이의 '바다'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이제 곧 '여행이'와 '바다'가 함께 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