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탕입니까 남탕입니까

여탕이든 남탕이든

by 여행하는가족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요즘 내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다. 마흔 하고도 중반의 나이에 생긴 아이라는 이유로 둘째가 찾아왔다는 기쁨만큼이나 커다란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임신 21주 차를 지나고 있다. 임신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 부쩍 배가 더 커진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만나는 사람마다 불룩해진 내 배를 바라보며 같은 물음을 던지는 걸 보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딸이어도 좋고 아들이어도 좋다. 정말이다. 첫째 때는 살짝, 아주 살짝 더 원하는 성별이 있었지만 이번은 아니다. 하지만 남편의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 해도 은근 딸을 기다리는 눈치다. 그런데 첫째 아이의 생각은 또 다르다. 대화의 반 이상이 축구 관련 주제를 맴돈 지 어언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여행이는 자기랑 함께 공을 찰 수 있는 남동생이 태어나게 해달라고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간곡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서로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차서 '주고받기'위해서는 족히 7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 말로 아이의 꿈을 와장창 깨뜨리고 싶지는 않다. 여하튼 상황이 이러하니 내 뱃속에 있는 바다가, 당신 말도 옳고 당신 말 또한 옳다 하는 황희 정승도 아니고, 입장이 난처할 게 분명하다.


임신 9주가 되면 태아의 생식기가 남녀로 구분되어 발달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여아의 경우 임신 11주 즈음, 남아의 경우 임신 13주에서 14주쯤에 발달이 완료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는 임신 14주 차에 이르면 초음파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며 임신 20주 차 이후부터는 성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했다.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묻는 질문을 워낙 자주 받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난 글에서 잠깐 언급했듯, 어쩌다 보니 우리 부부에게는 한국을 떠나 있을 때마다 새로운 생명이 찾아오고 있다. 둘째인 바다를 임신한 지금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살고 있지만 첫째인 여행이는 미국에서 임신을 거쳐 출산까지 마쳤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뱃속에 여행이를 품고 있었을 때의 일.


그즈음 한국에 살고 있던 친구들 중에도 나처럼 임신을 한 이들이 많아 종종 난 그녀들이 산부인과에 다니는 이야기를 전해 듣곤 했었다. 가만 보니 한국에서는 병원에 갈 때마다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받아 오고 입체 초음파 같은 것도 여러 차례나 찍는 것 같았다. 초음파 사진이 무언가. 다른 사람은 아무리 뚫어져라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알아보기 힘든 와중에 제 부모 눈에만 오뚝한 코며 동그랗게 튀어나온 이마, 시원하게 쭉 뻗은 튼튼한 다리 등이 도드라져 보이는 마법의 사진이 아닌가. 톡 까놓고 말하자면 가끔은 제 아빠도 못 알아보고 엄마 혼자서만 알아보는 사진이지만, 그래도 내 뱃속 아이의 모습을 그렇게나마 확인하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은 서비스를 기대하며 산부인과를 찾았다. 그런데 웬걸. 일단 초음파 검사는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다면 임신 전체 기간에 걸쳐 딱 두 번만 해도 된다는 거였다. 이런 이유로 태아의 성별도 임신 20주가 다 되어가는 시기, 두 번째 초음파 사진을 찍으러 가서야 확인할 수 있었고, 우리는 이 드문 기회에 챙길 건 다 챙겨보자는 마음으로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이 10개씩 다 붙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국의 산부인과에서는 따로 요구를 안해도 알아서 확인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요청했던 것인데 내 말을 들은 담당의사는 별 걸 다 궁금해한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손가락이랑 발가락 개수요? 그거는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네요. 궁금하면 직접 세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결국 나와 남편은 시커먼 바탕에 하얀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조그만 초음파 사진을 붙잡고,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넷... 하다가 야야, 관두자, 손가락 발가락이 부족하다고 안 낳을 것도 아니고, 그만 세자하고 되돌아 나왔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9년 전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산부인과에서의 경험도 미국에서 겪은 것과 자못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 달 반 간격으로 검진을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 나를 담당하는 분은 인자한 인상의 할머니 의사다. 내가 그분을 만나러 가는 날이면 여행이는 늘 자기 동생이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여행이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여동생 옵션은 없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모른 척하기 힘든 나는 은근슬쩍 성별을 물어보지만 그분의 대답은 늘 “20주는 넘어야 확실히 알 수 있어요.”로 대동단결이다. 초음파 검사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다. 하기야 하되 태아를 여러 각도에서 돌려가며 살펴보는 것도 아니요, 그저 머리 사이즈와 몸 전체 사이즈를 빠르게 재고 심장 소리만 확인하고는 “주수에 맞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네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진료는 끝이 난다. 그래서 나는 놀랍게도 임신 21주 차에서 22주 차로 접어드는 오늘까지도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바다가 여자 아이인지 아니면 남자아이인지 모르고 있다. 아이고, 답답해라!



여탕입니까 남탕입니까

첫째인 여행이는 남자아이지만 만으로 세 살 정도까지는 목욕탕이나 온천에 갈 때마다 엄마인 내가 여탕으로 데리고 들어가곤 했었다. 그러던 아이가 훌쩍 자라 처음으로 아빠 손을 잡고 남탕으로 들어가던 날, 홀로 여탕에 앉은 나는 참 쓸쓸했었다. 이상도 하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끄러운 목욕탕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려는 아이에게 뛰지 말아라, 그러다 넘어질라, 그 물은 깊으니까 들어가면 안 돼, 잠깐만 얌전히 있어봐, 샴푸는 씻어내야지 외치느라 정작 나는 뜨끈한 물에 몸 한 번 느긋하게 담가보지 못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고속으로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혼자서 조용히 목욕할 날을 기다렸으면서. 뜨끈한 물에서 얼마나 여유를 잘 즐겼는지 볼이 발갛게 상기된 혈색 좋은 남편을 마주하고는 부럽다는 생각, 얄밉다는 생각까지 했던 내가 아빠의 손을 잡고 남탕으로 들어서며 엄마 빠빠~ 이따가 만나라고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는 여행이의 모습을 계속해서 복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소망하던 조용하고 여유로운 여탕에서의 시간 동안 나는.


여탕이든 남탕이든 어쨌든 우리는

예약이 밀려 있다던 초음파 담당 선생님과의 약속이 드디어 내일모레로 잡혔다.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동생의 성별을 묻는 여행이에게 "다음번 진료 때 알려주신대"라고 답하던 날들이여 안녕~ 내 배를 바라보며 여자아인지 남자아이인지를 묻는 이들에게 "저도 아직 몰라요."라고 답하던 날들도 안녕! 바다의 성별을 확인하게 되는 날이면 모든 것이 선명해질 것이다. 여행이처럼 바다도 생후 삼 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만 나와 여탕에 들어갔다가 이후로는 아빠와 여행이의 손을 잡고 남탕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로도 계속 나와 여탕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 둘 중 어떤 것이라도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은 있을 테지만, 뭐 어찌 되든 좋다. 성별 보고 선택해서 낳을지 안 낳을지 결정할 것도 아니고 어떤 아이든지 건강하게 태어나 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가 어느 탕으로 가게 되든 아이가 잡고 있는 손은 어쨌든 우리 가족 중 누군가의 손일 테니까.

임신 22주에 이르는 날까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우리 바다의 성별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두바이에서는 왜 웅크리고 자고 있는 태아를 톡톡 건드려 깨워서 적극적으로 성별을 확인해주지 않을까라는 불만이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그 또한 거짓일 테고. 그래도 일종의 느림의 미학이랄까?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상상하면서 우리 바다가 여자 아이일 경우와 남자아이일 경우, 아이의 삶과 나머지 가족들의 삶을 마음껏 상상해 볼 기회가 있어 좋았다.


그나저나 바다야, 기억해 줘. 너의 성별이 무엇이든 우리 가족은 한마음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오늘도 엄마 뱃속에서 통통통 신나게 발 구르고 손도 휘저으면서 건강히 자라렴. 우리 가족 모두는 네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널 두 손 벌려 환영할 테니까.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말인데, 네가 여자 아이라 해도 여행이 오빠는 너를 아주 아주 귀여워하며 사랑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엄마하고 여탕 갈지, 아니면 아빠랑 여행이랑 남탕으로 갈지 짜잔~하고, 밝혀주렴. 알겠지?


첫째인 여행이는 남자아이지만 만으로 세 살 정도까지는 내가 여탕으로 데리고 들어가곤 했었다. 이날은 얼굴부터 발가락 사이사이에까지 묻은 모래를 털어주느라 더 분주했었지.
(좌)엄마랑 여탕 다니던 시절의 여행이 (우)아빠랑 남탕 다니던 시절의 여행이. 그나저나 이 물안경만 쓰면 눈을 제대로 못 떠서 더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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