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밑에 숨겨둔 유년의 조각들

그 시절 우리 집 안방에는....

by 김유인

어릴 때 우리 집 안방에는 덩치 큰 세 짝짜리 나무 장롱이 주인처럼 버티고 있었다. 아직 자개장이 들어오기 전이라 어두운 색의 장이었지만, 엄마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매일 쓸고 닦아 윤기가 나게 만들었다. 덕분에 장롱은 당당하게 안방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장롱 안에는 매일 아침 정성껏 접어놓은 이부자리가 보관되어 있었고, 또 한쪽에는 엄마가 아끼시던 한복과, 아버지의 양복들이 윤기 나게 걸려 있었다. 그 시절 안 방의 장롱은 그 방의 주인공이었으며, 안방은 우리가 잠도 자고 밥도 먹으며 숙제와 놀기도 하는 만능 공간이었다. 지금처럼 안방이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가족의 중심이었던 시절, 장롱은 어른처럼 조용히 자리 잡고 우리 가족의 희로애락을 지켜보았다.

우리 자매들에게 장롱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거대한 보물상자였다. 그 안에는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놀이터와 낡은 저금통이 함께 들어 있었다. 어쩌다 생기는 10원짜리 5원짜리 동전을 가지고 놀다가 장롱 밑으로 동전이 굴러 들어가면 다시는 꺼낼 수가 없었다. 장롱 밑바닥이 무정한 은행이라면, 장롱 안쪽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아지트였다. 가지런히 정돈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놀다가 이불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혼나기도 했다. 숨바꼭질을 하는 날은 장롱 안은 숨기 좋은 장소로 바뀌어서 옷들 사이나 서랍을 열고 들어가서 숨다가 잠들기도 했었다. 아직도 그때 장롱을 열면 나던 특유의 옻칠 냄새와 어두컴컴하게 걸려있는 옷들 사이로 나던 나프탈렌 냄새가 기억이 난다. 그 안에서 숨어있는 나를 언니가 찾을 때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가곤 했었다.

매일 언니들과 장난치다가 동전들을 실수로 넣는 일이 반복되곤 했는데 장롱은 맡은 돈을 절대 안 내놓는 거대한 은행이었다. 우리는 동전이 들어간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사하는 날, 장롱밑에 오래된 먼지와 함께 발견된 동전들을 보며 환호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며칠은 사탕이나, 뽑기를 실컷 할 수 있는 두둑한 용돈이었다. 골목 밖 달콤한 냄새가 나는 뽑기 천막으로 달려가 동전 한 닢을 건네고 초조함에 침을 꿀꺽 삼키며 앉아서 기다리던 마음. 마침내 받아 드는 노리끼리 동그란 판에 별 모양이나 목이 가는 열쇠 구멍 모양이 찍힌 뽑기를 소중하게 받아, 침을 묻히거나 바늘로 살살 잘라내는 그 간절함, 공들여 녹여가던 가느다란 목부분이 툭 부러질 때의 안타까움은 이제 별처럼 아스라하게 멀어지는 추억이다.

엄마가 그토록 아끼던 장롱도 세월이 가면서 삐걱대고 못이 빠져나오기도 했었다. 거울이 달린 문 앞에서 놀다가 거울을 깨뜨려서 혼나기도 했었던 추억의 장. 더 이상 장롱과 놀지 않는 나이가 되었던 어느 날, 낡은 장을 치우고 자개농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그 장롱이 얼마나 작고 초라했는지 깨달았다. 그때 그 장을 어떻게 했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요즘은 자개농조차 쓰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고, 문득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다 조용히 사라진 그 장롱이 궁금하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