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나의 어금니

조용히 버틴 50년

by 김유인

얼마 전부터 어금니에 묵직하게 파고드는 통증이 생겼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거나 종이에 손을 베는 것 같은 격렬하고 날카로운 통증은 아니었다. 그저 좀 불편하지만 참을 만한 통증이었는데, 이 둔한 감각이 24시간 내내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변에 "어금니가 좀 아픈데…"라며 운을 떼보았다. 평소 엄살이 심한 편이라 그런지 남편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별거 아니겠지 싶어 '좀 참아보자' 하고 넘겨버렸다. 나이가 들어가며 주변에서 치통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남의 얘기라 생각했다. 난 비교적 뼈가 튼튼한 편이라 치아도 건강했고, 약간의 치료가 있기는 했지만 정기적인 점검과 스케일링으로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통증은 점차 잠을 설칠 정도로 심해졌다. 진통제도 잘 듣지 않아 결국 치과 예약을 잡았다. 의사 선생님은 치아에 얼음을 대보고 두드려도 보았지만, 정작 그런 물리적 자극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선생님은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더 아플 때까지 기다려 보자며 나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나는 결국 다시 치과를 찾아야 했다.


​이번에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주 오래전에 때운 어금니에 금이 간 걸 발견했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고 했다. 상한 것도 아니고 금 간 걸로 이를 뽑다니.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면 깁스를 하면 되는데, 다른 방법은 없냐고 확인했지만 그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나의 몸인데,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살았었는데, 너무 슬펐다. 부정해도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유독 얼음 깨 먹는 것을 좋아했다. 야간 근무를 할 때, 모두가 잠든 고요한 병동에서 나를 괴롭히는 몇몇 어르신들 사이로 화를 삭여야 했던 밤들. 그때 나는 얼음을 '오도독 오도독' 씹으며 마음을 달랬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나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자업자득이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당연히 집에서 이를 뽑았고 그때 이 뽑은 게 무슨 무용담으로 얘기되곤 했었다. 그렇게 뽑은 이는 지붕으로 던지면서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를 외쳤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 빼는 게 무서워 도망도 다녔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작으로—아버지는 팔다리를 잡고 어머니는 실을 거는—공포의 과정을 거친 덕분에 웃을 때 가지런한 앞니를 갖게 되었다. 앞니 빠진 아이를 보면 "앞니 빠진 중강새, 우물가에 가지 마라. 붕어 새끼 놀란다, 잉어 새끼 놀란다."라고 놀려 먹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발치를 결정하고 몸을 벌벌 떨며 경직된 채 진료 의자에 누웠다. 밝은 불빛이 눈앞을 비추고, 나는 입을 벌린 채 눈을 감았다. 마취 크림을 바르고 턱과 어금니 주변에 주삿바늘이 들어갔다. 곧 감각이 사라졌다. 다행히 치아가 바르게 자리 잡고 있어 선생님이 두어 번 힘을 쓰자 손쉽게 뽑혀 나왔다. 그렇게 생니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생각보다 통증도, 피도 적었다.


​그렇게 50년 가까이 나와 한 몸이었던 어금니가 지퍼백에 담겨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어금니인데도 생각보다 훨씬 작고 가냘팠다. 이렇게 왜소한 어금니가 평생 내 입속에서 건강을 위해 묵묵히 수고를 했었고, 매일 밤 얼음을 씹으며 고통을 줬는데 비명도 못 지르고 나의 스트레스를 조용히 받아줬었다. 내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까지 책임지다가 이제는 못 버틴다고 비명을 질러댔던 거다.


​집에 돌아와서 이 어금니를 지붕에 던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긴 싫어서 서랍 깊숙이 넣어뒀다.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지혈을 위해 물고 있던 피에 젖은 솜뭉치가 그 자리에 있었다. 솜을 뱉어내고 드러난 텅 빈자리, 그리고 그 위에 생겨난 붉은 피딱지를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 계속 떨어져 나갈,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던 것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이갈이가 인생 첫 통과의례라면 나는 지금 또 다른 노년으로 가는 통과의례를 지나는 중인가 보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