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좋은, 선물 같은 시간
지난 2월 마지막주,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일 하는 도중, 갑자기 어깨에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생기고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캐나다에선 일하다 다친 노동자를 보호하는 규정이 있다. 일단 일을 중단하고 매니저에게 보고하는 게 회복의 시작이다. 매니저는 다친 사람을 간호사한테 보내서 상처에 필요한 응급처치를 해준다. 일하다가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어마 어마한 서류를 작성하고 하루정도 기다렸다가 부상이 장기화될 경우 패밀리 닥터를 만나고 사건을 WCB( Worker's Compensation Board)에게 보고한다. 접수를 받으면 WCB는 부상당한 사람과 전화로 상황을 보고 받고, 회사와 의사의 보고서를 받아서 심사를 한다. 접수가 되어 통과하면 평소 받는 급여의 90%가 나온다. 나는 몸의 통증이 괴롭혔지만, 경제적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나 자신과 일상에 집중했다.
나 같은 경우엔 하루가 지나고 어깨와 팔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자면서 움직이면 더 아파서 밤잠까지 설쳤다. 패밀리 닥터를 만났고, 의사가 10주 정도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렇게 물리치료를 받으며 지낸 시간이 10주 정도 됐다. 이제는 통증도 거의 좋아졌고, 5월 둘째 주에는 직장으로 복귀명령을 받았다.
나의 은퇴계획은 5년 정도 후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 직업의 은퇴시기는 일반적으로 65세이지만 정해진건 없어서 본인이 원하면 70세가 넘어서도 일을 하기도 한다. 캐나다는 60세부터 은퇴를 받아주긴 하지만, 그러면 연금이 줄어든다. 주변에서는 은퇴를 하고도 Casual Position이라고 해서 정직원처럼 근무는 안 하지만, 필요할 때만 오는 직원으로 근무를 한다. 연금 만으로 은퇴 전 수입을 벌기 어렵고, 집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은퇴 후 많이 나온다.
일을 쉬고 나서 처음엔 통증 때문에 짜증도 났지만, 진통제와 정기적인 물리치료 덕분에 지내기가 편해졌다. 날씨가 점점 좋아지고 통증도 줄어들면서 기분도 좋아졌다. 처음엔 이런 긴 휴가가 어색하고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캐나다에서 22년 동안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살기 위해서 계속 일을 해야 했다. 낮동안 집에서 쉬는 건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밝을 때 집에 있는 게 어색해서 꼭 남의 집에 와 있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 시간은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나에게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쪽으로 거실이 있는 우리 집은, 햇볕의 공격을 안 받는 아침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일어나서 나만의 브런치를 준비한다. 방금 삶아 따끈한 달걀과 그릭 요거트에 바나나를 섞고, 건강을 위해 플렉시드 한 숟가락을 넣는다. 다른 날은 바삭한 바게트빵에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 싱싱한 토마토와 프로슈토를 얹어서 먹으면, 그 고소함에 미소를 짓는다. 가끔은 뜨겁게 끓인 오트밀에 황설탕 한 스푼을 넣고 차가운 우유를 부어 먹으면, 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한다. 빨간 사과와 영양제도 잊지 않는다. 매일 바쁘게 서두르며 먹거나 건너뛰는 아침이 아닌, 신선한 재료로 준비해서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먹는 아침은 있는 자만의 여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왔다. 식사 후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며 점점 밝아오는 거실밖을 바라보는 게 행복하다. 아직은 조용한 오전의 거리에 노령의 부부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정답게 얘기하며 걸어간다. 문득 그분들의 인생이 궁금해진다. 은퇴한 사람의 전유물인 화분에 꽃씨도 심고, 겨울에 꺾어와서 이틀에 한 번 물을 갈아 정성껏 키운 사르코코카가 뿌리가 났다. 하얀 화분에 옮겨 심었더니 초록색 잎을 뻗어 창가에서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아침 식사 후 간단한 청소와 운동을 마치면, 책상에서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다. 일할 때는 휴식시간이나 퇴근 후에 글을 썼다. 그때보다 한결 여유 있고, 편안하게 글을 쓰며 책도 보는 이 시간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음악도 듣고, 오랫동안 연락 못한 친구 들과도 연락하고, 다만 불편한 어깨와 팔 때문에 칼질이 많이 필요한 요리는 포기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들이 내가 은퇴하면 하는 일들을 미리 해보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편안한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통증도 많이 좋아졌지만, 다시 치열하게 살아야 할 생각을 하면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이 꿈결 같은 휴식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나를 다시 치열한 현장으로 내 보낸다. 이렇게 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나의 은퇴 연습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