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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Mar 30. 2021

누가 나에게 기회를 주었을까

비토 이야기 –3–

띵동. 


예감이라는 것은 참 신기한 녀석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이메일 알림이 울렸다. 업무 시간 이후에는 보통 이메일 확인을 하지 않는 편인데 방금 온 저 이메일은 왠지 열어봐야 할 것만 같았다.


내일 아침 10시 10분까지 4407호로 오세요.


모르는 직장 동료로부터 온 간결한 이메일. 아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그날이 왔음을 직감하며 서둘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오빠,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 어딜 나가려구.”


나의 범상치 않은 행동에 아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 디씨 가봐야 할 것 같아.”


한밤중에 갑자기 워싱턴 디씨 Washington D.C.에 가겠다는 나의 말에 아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갑자기 밤 아홉 시에 다섯 시간 고속도로를 타고 디씨를 가겠다는 거야?”


“응, 내일 아침 열 시까지 오래. 내일 새벽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가서 디씨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럼 혹시...”


“응, 확실하진 않은데 그런 거 같아.”


근심 가득한 아내에게 괜찮다는 말을 연발하며 애써 웃어 보인 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간단히 챙긴 채 집을 나섰다. 헤븐리 힐스 Heavenly Hills로 이사온지 두 달, 회사의 배려로 나는 워싱턴과 헤븐리 힐스를 오가며 출근과 재택근무를 혼합한 형태로 일하고 있었다. 특별한 미팅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보통 헤븐리 힐스에 머무르며 재택근무를 했다. 미팅은 보통 일주일 전에 스케줄이 잡히기 때문에 오늘처럼 한밤중에 연락이 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서던 버지니아 Southern Virginia를 관통하는 85번 고속도로는 좀비가 휩쓸고 간 듯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차가 많지 않은 도로라 고즈넉하지만 월요일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의 고속도로는 완전한 적막을 자랑하고 있었다. 숲이 우거진 탓에 맹그로브 나무 터널 아래를 지나가는 듯,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라디오헤드 Radiohead의 데이드리밍 Daydreaming이 차 안에 울려 퍼지자 차안은 우주공간을 가로지르는 비행선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찼다. 


두 달 전부터 헤븐리 힐스와 워싱턴을 오가며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크게 켜고 심야에 85번 국도를 달리는 것이었다. 극도로 어둡고 살포시 안개가 드리운, 환상적인 숲길을 라디오헤드와 함께 달리고 있으면 트랜스 상태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일부러 심야 시간에 맞추어 헤븐리 힐스와 워싱턴을 오가곤 했다. 차도 막히지 않고 황홀경도 느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워싱턴에서 살던 옛 아파트의 계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잘 곳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버리듯이 두고 간 우리의 옛 침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날이 더웠기에 이불 따위는 필요 없었다. 집 안은 아까 본 고속도로처럼 텅 비어 있었다. 피로가 몰려오며 반쯤 실신 상태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열 시 오 분쯤 회사에 도착해 허겁지겁 사무실로 올라가니 비토 Vito가 싱글싱글 웃으며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헤이 비토, 너도?”


비토는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부각, 너도?”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친절하게도 비토는 자신이 방금 나왔으니 곧장 4407호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통유리 덕분에 방 안이 훤히 보이는 4407호 회의실 안에는 굳은 표정을 한 삼십 대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정갈하게 쪽진 머리에 정장을 입고 꼿꼿이 앉아 있었지만 한 번도 도끼를 휘둘러보지 않은 사형 집행인처럼 불안해 보였다. 어제 고속도로에서 상상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광경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는 와줘서 고맙다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자리를 권했다. 내가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흰색 종이 폴더를 펼쳐 내 앞에 내려놓았다.


“부각씨,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부각씨와의 고용 계약을 종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 회사 발전에 기여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눈앞의 서류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며 서류 하단에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펜을 들어 서류에 서명을 했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목소리로 그녀는 내가 받게 될 정리해고 위로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 몇 명에게 이 말을 더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건 기밀사항이라 알려줄 수 없다는 그녀는 많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려운 이야기 전하느라 힘드시겠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함께 일어섰지만 적절한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한 듯 침묵을 지켰다. 나는 통유리 덕분에 방 안이 훤히 보이는 4407호를 빠져나왔다.


“비토, 난 이제 자유인이야!”


“나도!”


우리는 자유인이 된 기념으로 나가서 한 잔 하기로 했다. 우리는 화요일 점심 스페셜 요리로 화이트 와인 홍합찜을 제공하는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항상 마시는 페로니 Peroni 맥주도 함께 주문했다. 우리는 자유인을 위한 건배를 외치며 페로니를 들이켰다. 레몬을 곁들인 와인 소스와 홍합의 조화가 오늘따라 더욱 완벽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마친 우리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단골 카페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비토가 나의 입사 첫날 소개해 준 그 카페였다. 이런 걸 수미상관이라고 하던가. 비토는 언제나처럼 카푸치노 잔에 든 코르타도 cortado를 마시고 있었고 내 앞에는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의 잔이 일회용 컵에서 두툼한 머그잔으로 바뀌었다는 점과 오늘이 우리의 첫날이 아닌 마지막 날이라는 점이었다.


“비토,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입사 첫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 처음 입사한 날, 왜 날 보고 그렇게 반가워했어? 우리 그전에 딱 한 번 만난 사이였잖아.”


첫날부터 궁금했지만, 나를 반겨주는 사람한테 왜 이러냐고 의아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동안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보다 이 질문을 하기에 더 적절한 날이 있을까. 비토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얘기 안 했었나? 베사니 Bethany한테 너를 고용하자고 적극적으로 추천한 게 나였어. 내가 이 년 동안 우리 팀에 졸라서 널 뽑은 거니까 당연히 네가 입사했을 때 신나서 반가워했던 거지!”


전혀 의외의 전개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왜? 나는 비토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다그치듯 캐 물었다.


“비토, 날 한 번 보고 대체 왜 추천한 거야? 이해가 안 가는데.”


비토는 오히려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우리 처음 본 날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안 나? 내가 지나가는 널 붙잡고 말을 걸었잖아.”


비토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날 나는 언제나처럼 프리랜스 작업을 위해 회사를 방문 중이었다고 했다. 그의 팀과 볼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른 팀과의 미팅이 있었다. 당시 그는 어떤 웹페이지 관련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코딩과 관련된 어떤 문제로 끙끙대고 있었다. 갖은 방법을 써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반 포기 상태였는데, 마침 미팅을 끝낸 내가 그의 책상 앞을 지나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토는 겨우 얼굴 정도만 알고 있는 나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나를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데려온 비토는 다짜고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설명하고 내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나는 간단히 해결이 가능하다면서 일분 정도 그의 책상 앞에서 무언가 뚝딱뚝딱 작업을 했고, 그를 하루 종일 괴롭히고 있던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했다. 나의 가공할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비토는 나에게 같이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나와 헤어지자마자 베사니에게 뛰어가 저 친구를 고용해야 한다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강 이런 줄거리였다. 어렴풋이 내가 그의 책상 앞에서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은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해 주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같이 일하고 싶은지 물었다는 부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비토는 그날부터 틈만 나면 나를 데려오라며 팀장인 베사니에게 졸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은 21세기 팍스 21st Century Fox와의 합병 등 대규모 구조조정 기간을 맞이했고, 비토의 팀을 포함한 대부분의 팀은 다시 신규 직원을 채용을 시작하기까지 이 년이라는 기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어느 날 너무도 뜬금없이 연락을 해서 나를 채용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다만 그것이 이 년 전 내가 비토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세상에, 그랬구나. 근데 같이 일해보자고 말해놓고 이 년 지나서 연락하는 회사가 어디 있냐.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안 그래?”


비토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웃고 말았다. 뭐 이제 둘이 같이 짤렸는데, 어떻게 뽑혔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돌이켜보니 내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보낸 시간은 3년 반 정도 되었다. 그동안 최소 다섯 번이 넘는 대규모 정리해고가 있었는데 용케도 비토와 나는 다섯 번의 정리해고에서 모두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디즈니 Walt Disney Inc.와의 합병 이후에 벌어진 여섯 번째 정리해고에서 우리는 사이좋게 나란히 짤렸던 것이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토, 넌 이제 뭐 할 거야?”


“아마 자그레브 Zagreb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안젤카 Anđelka가 고향을 그리워하거든. 난 이제 풀타임으로 기타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루 종일 기타를 만들 수 있으니 나한테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라. 크로아티아는 미국보다 물가가 싸서 모아둔 돈으로 버티기도 더 좋을 테고... 부각, 너는 이제 뭐 할래?


나는 워싱턴의 집을 정리하고 헤븐리 힐스로 내려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계획도 없었다. 그 시골 마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 아무 계획도 없는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이었다.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볼까. 기타리스트로 전업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던 나는 언젠가 게임을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와 부족한 능력, 그리고 나의 게으름으로 그 꿈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번 기회가 나만의 컴퓨터 게임을 만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비토는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근처 아이리시 펍 Irish pub으로 자리를 옮겨 게임 제작과 기타 제작에 관해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내내 사무실 주변의 카페와 펍을 맴돌던 우리는 마지막 가게를 나와 워싱턴의 17번가를 삼십 분 정도 걸었다.


“비토, 이제 이쯤에서 헤어지자. 행운을 빌께.”


“잘 가, 부각. 다음에 보자.”


우리는 굳게 악수를 나누고 각각 북쪽과 남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주차장까지 삼십 분을 더 걸어와 차에 시동을 걸고 도시를 벗어났다.




“네, 네, 아니요, 저는 지금 워싱턴이 아니에요. 헤븐리 힐스예요. 네, 남부의 거기 맞아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리사 Lisa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마지막 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했던 그녀는 워싱턴에 있는 다른 회사에서 사람을 찾고 있다며 내게 관심이 있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했다. 좋은 기회였지만 이미 워싱턴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헤븐리 힐스로 내려온 탓에 아쉽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리사가 이메일로 다시 연락을 해왔다. 그 회사 담당자가 헤븐리 힐스에서 재택근무를 해도 좋다는데 그래도 관심 없니? 심드렁하게 이메일을 읽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떡하지. 게임 개발을 하던 디자인을 하던 혼자 일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업자 등록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어렵사리 마음먹었는데, 면접 기회 한 번에 우유부단한 나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크로아티아로 돌아간 비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이 맨, 어쩐 일이야!”


비토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나는 리사의 전화와 나의 고민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내뱉었다. 이참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회사와 면접을 보아야 할까. 수화기 너머로 비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리사가 연락했다고? 사실 리사가 나한테 먼저 연락을 했었어. 그런데 내가 크로아티아로 돌아가서 기타를 만들겠다고 거절했거든. 그랬더니 그녀가 너한테 연락을 했구나.”


말하자면 비토가 거절함으로써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준 셈이었다. 리사가 비토랑 워낙 친한 사이라 나에 앞서 비토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비토의 거절로 그 기회가 나에게 넘어온 것은 의외였다. 비토가 또 내게 기회를 주었구나, 참 희한한 인연이다.


정작 비토 자신은 그 기회를 거절했음에도, 그는 나에게 면접이라도 한 번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일 년 정도 일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면 되지 않겠냐는 논리였다. 너무 논리가 탄탄해 반박 한 번 못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면접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공식 퇴사 일자가 되기도 전에 새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이전 직장 인사팀에 연락해 나의 정리 해고를 이주일 앞당겨 달라는 웃지 못할 요구를 하게 되었다. 입사 일 년 육 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헤븐리 힐스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비토는 이십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그레브 시내에 새 아파트를 얻고 새로운 기타를 디자인하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수제 기타를 파는 데 성공했다. 구매자는 어느 프로페셔널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였는데, 그의 기타는 여느 기타 장인들의 작품처럼 비싼 가격에 팔렸다. 우리는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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