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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Apr 05. 2021

악은 평범하고 삶은 계속된다

2008년 1월,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두었던 나는 치열한 취업 경쟁을 거쳐 오백여명을 뽑는 어느 기업의 공채에 합격했다. 플랜트 기계 부품을 파는 유럽 담당 해외 영업팀의 사원이 된 나는 부푼 꿈을 안고 아침마다 거울 속의 나에게 넥타이를 매어 주곤 했다. 회사에서는 우리 팀에 거는 기대가 컸는지 겨우 신입사원인 나를 쉴 새 없이 비행기를 태워 출장을 보냈다. 어떤 때는 귀국하자마자 이틀 만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가는 경우도 있을 만큼 원 없이 비행기를 타는 날들이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미국의 리만 브라더스 Lehman Brothers Holdings Inc.가 파산 산청을 하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세계 금융 위기는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유럽 영업팀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비행기 표 값이 아까워 출장을 줄일 만도 한데 회사는 더욱 공격적인 영업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듯 보였다.


결과적으로 공격적인 영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가 입사한 2008년 1월부터 2009년 6월 말까지 일 년 육 개월간 유럽 영업팀은 단 한 건의 수주 실적도 올리지 못했다. 같은 기간 수주 목표가 천억이었기에 팀 분위기는 지구에 종말이 온 듯 어두웠다. 애가 탄 팀장은 전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상반기 수주 목표가 천억이었다는 사실 다들 알지?”


의외로 팀장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고 팀원 중 최고참인 한과장은 김대리와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오직 연차가 적은 사원들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자,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한과장이 우리 팀 최고참으로 이백억을 해줘야겠어.”


한과장은 호기롭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어 김대리 백억, 박사원 백억으로 배급 전표 나누듯 숫자를 읊어대던 팀장은 내 이름 석자에도 백억 이라는 숫자를 부여했다.


“일단 상반기 수주는 이렇게 한 걸로 치고 보고를 올리자고. 다들 연말에 펑크 안 나게 신경 쓰고!”


그러니까 상반기 수주 실적이 말 그대로 “빵 원”이지만, 사장에게는 목표를 달성했다고 가짜 보고를 올린 뒤 시간을 벌겠다는 말이었다. 상반기에 한 거짓말을 하반기에 열심히 해서 메우자는 논리였다. 결과적으로 연말까지 나 혼자 올려야 할 실적은 백억의 두배인 이백억이었다. 상반기에 실적이 제로인데 어떻게 하반기에 기적처럼 팀 전체가 이천억의 실적을 올릴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팀장님, 전 못하겠습니다.”


점심으로 무얼 먹을지 떠들며 일어서던 팀 전체가 일순간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의자에서 떨어졌던 엉덩이들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표정으로 팀장이 물었다.


“으응...? 부각씨, 그게 무슨... 말이야?”


“상반기 매출이 제로인데 어떻게 하반기에 목표치의 두 배를 할 수 있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저는 여기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수주 장부를 조작하는 행위는 사기이며 경우에 따라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주식회사의 허위 공시에 일조하는 행위에 모두 동의한 것인데 내 말에 찬성하는 사람이 열 명 가까운 팀원 가운데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어어... 그래. 그럼 부각씨는 안 하는 걸로 알고 김대리가 백억 더 해.”


장교 출신의 김대리는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미션을 받은 군인처럼 짧게 “예” 하고 대답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회의실을 떠난 순간,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심을 거른 나는 회사 일층 뒷마당의 정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계는 이미 오후 두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7충 사무실 내 자리를 한 시간 가까이 비웠지만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부각이 뭐하냐.”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경영지원팀 이차장의 얼굴이 보였다. 애초에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듯 그는 내가 앉은 정자 벤치를 훌쩍 넘어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독한 골초답게 입에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대가 물려 있었다. 엉겁결에 인사를 하는 나를 보며 이차장이 말을 이었다.


“고민 있구나. 말해봐.”

 

붙임성 좋고 신입사원들에게 특히 자상한 이차장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 속의 두 눈은 좀처럼 흰자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는 경영지원팀에 있는 일개 차장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그가 오너 일가 둘째 아들의 오른팔임은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가 맡은 경영지원팀도 평범한 경영지원팀이 아닌 둘째 아들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는 팀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이차장은 종종 내게 말을 걸며 친근감을 표시하곤 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오전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이미 팀에서 미운털이 박힐 대로 박혔는데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질 것도 없었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던 이차장은 걱정하지 말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감사팀이 들이닥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팀장은 내가 출근하기도 전에 어딘가로 불려 가 자리에 없었다. 우리 팀이 있는 7층의 모든 팀들이 내부 고발자가 누구인지 추측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유럽 영업팀의 팀원들은 그 고발자가 누구인지 강한 심증은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나에게 와서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는 듯 잠자코 있었다. 반년 전에 입사한 신입사원 후배 한 녀석만이 줄기차게 내게 와서 “선배 아니죠?”라는 질문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얼마 뒤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누구도 내 앞에서 나를 비난하진 않았다. 오히려 신입사원들은 말도 안 되는 팀장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한 나에게 내심 고마운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감사팀 출동으로 더 이상 허황된 수주 목표를 채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 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계속 출근하기가 불편했다. 죄인들이 득실대는 사무실이라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없었지만 은근히 뒤통수가 따가웠다. 특히 다른 팀 팀장들은 나를 아주 위험한 사원이라고 생각해 대놓고 경계했다. 플랜트 부품의 가격 담합부터 수주 장부 조작 및 해외 에이전트 리베이트를 통한 횡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던 그들에게 나의 존재는 눈의 가시였을 것이다.


사직서를 제출하자 가장 먼저 만류한 사람은 경영지원팀 이차장이었다. 내가 그만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부 고발로 회사에 기여한 공로자가 압박에 못 이겨 퇴사하는 모양새이니 난처했을 법도 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날 사표를 제출할 필요가 없었으나, 경험 없는 사회생활 초년생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내 잘못 같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팀원들은 날 위한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공식적으로 고발자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팀장과 유럽 담당 상무까지 내 송별회에 참석했다. 반년 전에 입사한 신입사원 후배는 나의 송별회에서까지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기막힌 상황의 부조리성에 나는 그 후배를 앞에 두고 결국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끝내 그는 나의 확답을 듣지 못했다.


삼차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상무는 만취상태로 논현동의 어느 카페로 우리를 데려갔다. 새벽 두 시가 넘어 도착한 카페에서 그는 “양차장”을 목놓아 불러젖혔다. 인사팀 양차장을 찾는 줄 알았던 나는 이내 “양차장”이 그의 단골 카페 마담임을 깨달았다. 교태를 부리며 뛰어나오는 중년의 “양차장” 품 속에 안겨 상무는 상석으로 이동했다. 그녀에게는 교태가 그저 업무의 일부일 뿐이지만 상무는 기분이 무척 좋은 듯 보였다.


“니 회사 그만두면 뭐할 건데?”


자리에 앉자마자 상무는 카랑카랑한 경상도 사투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아직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해보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 그림을, 화가가 되려고 합니다.”


“뭐, 화가? 이기 무신 소리고!”


내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상무가 화를 버럭 냈다. 주변의 팀원들이 허둥지둥 상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내가 실제로 미대를  생각이 있다고 읍소했다. 나와 팀원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분이 아직  풀렸는지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니 화가 되면 첫 번째 그림은 나 주는 거다!”


출근 마지막 날 퇴사를 앞두고, 그것도 새벽 세시까지 상무의 술 시중을 들면서도, 조금은 남아 있었던 나의 애사심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나는 침묵을 지킨 채 상무와 “양차장” 앞에 앉아 있었다. 상무의 오른손이 “양차장” 블라우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양차장”의 왼쪽 다리는 예술적인 각도로 치마 속에서 뻗어 나와 상무의 왼쪽 허벅지에 올라가 있었다. 라오콘 Laocoön을 휘감은 뱀처럼 치명적이었다.


“이 새끼, 대답을 안 해!”


순간 역겨움이 강하게 밀려왔다. 이 사람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자정이 지난 세 시간 전부터, 아니, 퇴근 시간이 지난 어제 저녁부터 난 그의 부하 직원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옆에서 보던 팀장이 사색이 되었다.


“무릎 꿇어. 무릎 꿇어, 이 새끼야!”


술에 취해 카페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그의 손에는 “양차장”의 왼쪽 젖가슴 대신 골프용 장우산이 들려 있었다. 내가 무릎을 꿇자 안절부절못하고 지켜보던 팀장과 팀원들이 상무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문득 고개를 들자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던 “양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흐트러진 블라우스를 정리하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차가운 경멸의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처럼 스무스하게 잘 좀 할 수 없어?’ 그녀의 한기 서린 눈이 거칠고 서툰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나의 첫 번째 그림을 상무로부터 지켜냈다.




“오빠, 잘 지내시죠?”


퇴사 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인사팀의 입사 동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은 학교 후배였던 그녀는 내가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에도 나를 위로해주었던 꽤 친한 직장 동료였다. 반가움과 함께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이런저런 근황과 안부를 주고받자 그녀가 용건을 꺼냈다.


“그런데 오빠 LG 기술 연구원으로 옮기셨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에요?”


지하철 역 출구를 빠져나와 미술학원으로 향하던 나는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녀가 경영지원팀 이차장을 통해 들었다며 알려준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차장은 내가 퇴사한 뒤 내가 경쟁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했다.


사실이 아닌 줄 안다면서도 그녀는 내가 정말 경쟁사로 옮긴 것이 아닌지 넌지시 되물었다. 회사의 누군가가 나의 동향을 궁금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소리 할 거면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가 된 전화를 끊었다. 내가 퇴사한 것 때문에 이차장이 난처한 상황에 몰려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일까. 나는 이차장의 뿔테 안경 너머 눈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을 기억해냈다.


일분 뒤 거짓말처럼 다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얼마나 더 황당한 전화가 올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지멘스 Siemens 한국 지사입니다. 현재 해외 영업 경험이 있는 사원을 모집 중입니다. 서울에서 이 년 근무 뒤 독일 본사로 발령을 내 드리는 조건인데 관심 있으신가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지금 미술학원에 가는 길인데요. 수화기 너머 상대의 당황한 목소리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나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그래,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이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만 갈래로 흩어지는 상념을 애써 추스르며 나는 제법 선선해진 골목 사이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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