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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Mar 28. 2021

우리의 기타가 부드럽게 울릴 때

비토 이야기 –2–

후덥지근한 초여름 오후의 공기를 뚫고 우리는 맷해터 Madhatter로 향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사무실을 빠져나온 덕분에 홀은 한산했다. 낯익은 홀 서버의 환영을 받으며 바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선 익숙한 자세로 라구니타스 Lagunitas와 하이네켄 Heineken을 시켰다. 올 때마다 주문하는 미니 치미창가스 mini chimichangas도 빼놓을 수 없었다.


맷해터는 가슴골이 깊게 파인 민소매 티셔츠와 미니 스커트를 입은 후터스 Hooters 스타일의 서버들이 김 빠진 생맥주와 맛없는 냉동 튀김을 파는 전형적인 싸구려 바였다. 회사 근처에는 고급 수제 맥주를 파는 맛집이 즐비했지만 타고난 마이너 감수성은 언제나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했다.


술잔을 앞에 두고 우리는 보통 회사 이야기를 하거나 음악 이야기를 하곤 했다. 90년대 크로아티아에서 꽤나 유명한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비토 Vito는 다양한 음악에 대해 알고 있었다. 벤 헤일런 Van Halen과 마크 노플러 Mark Knopfler로 시작해서 블루스와 월드 뮤직으로 이어지는 그의 폭넓은 음악 스펙트럼은 조용필로 시작해 라디오헤드 Radiohead로 이어지는 나의 뒤틀린 스펙트럼에 묘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축구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을 탈락시켜 유명세를 치렀지만 일찌감치 짐을 싼 한국과 반대로 크로아티아는 파죽지세로 8강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비토는 이번 주 토요일 자신의 집에서 월드컵 8강전을 함께 응원할 것을 제안했다. 크로아티아의 상대는 개최국인 러시아였기에 어려운 경기가 될 것 같았다. 우리는 잔을 비우고 악수를 한 뒤, 주말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 오느라 고생했어!”


안젤카 Anđelka가 특유의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나와 아내를 맞이했다. 집 안 어딘가에서 비토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의 대형 모니터가 8강전을 즐길 만반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비토의 원 베드룸 아파트는 간결하고 아기자기했다. 하지만 기타리스트답게 거실에는 대여섯 대의 기타가 스탠드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기타를 구경하던 내게 비토가 늘씬하게 빠진 클래식 기타 하나를 건넸다. 나무의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돋보이는 그 기타는 다른 기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볍고 손에 착 감겼다. 겨우 코드 잡는 법 정도만 알고 있는 내가 봐도 섬세하게 공을 들인 기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비토가 기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약 오 년 전부터였다. 전부터 수제 기타를 직접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던 그는 어느 날 한 달 휴가를 내고 매사추세츠 Massachusetts에 사는 수제 기타 장인의 워크샵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한 달간 기타 만드는 법을 배워 온 비토는 오 년째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기타를 만들고 있었다. 회사 일과 병행을 하는 탓에 진도는 매우 느렸고, 모든 기타 제작 도구를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드는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는 오 년 동안 단 하나의 기타를 가지고 작업하는 중이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기타는 바로 그가 오 년에 걸쳐 만들어낸 그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얼마 뒤 우리는 안젤카가 내 온 과일을 먹으며 8강전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경기는 동점에 역전을 거듭한 끝에 크로아티아의 극적인 승리로 끝났다. 우리 네 사람은 손을 맞잡고 크로아티아의 드라마틱한 승리를 축하했다. 약간의 사소한 잡담 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비토가 나를 불렀다. 그의 손에는 낡은 기타 한 대가 들려 있었다.


“부각, 너 기타 치고 싶다고 했지?”


나도 기타를 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언젠가 지나가듯 했던 말을 비토는 기억하고 있었다. 바디에 크랙이 조금 있지만 여전히 소리는 괜찮다며 그는 들고 있던 기타를 내게 건넸다. 다른 기타보다 길이가 짧아 초보자가 연주하기에 한결 수월하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기타 헤드에는 지아니니 Giannini라는 로고가 심플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낡았지만 꽤나 좋아 보이는 기타를 선물로 받은 나는 고맙다며 열심히 쳐보겠다고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안젤카가 일주일 있다가 때려치우지 말고 꾸준히 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한 나는 그럴 리 없다면서 큰소리를 치고는 문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날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두 달 정도 기타를 쳤었지만 이내 싫증을 내고 그만둔 이후 약 이십 년 만에 손에 쥔 기타였다. 안젤카 말대로 이번에는 그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매일 단 십 분이라도 기타를 치겠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나는 첫 코드를 손에 쥐었다.




나는 비토로부터 기타를 받은 날 이후로 일 년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타를 쳤다.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어도 반드시 했다. 정말 바쁜 날은 오 분 동안 손가락 운동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기타에 손을 뻗었다. 비토가 가끔씩 간단한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대체로 나의 기타 스승은 유튜브와 종이 악보였다. 나는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쳤다. 실력이 늘지 않아 좌절하는 순간을 수없이 맞이했지만 꾸준함의 힘을 믿으며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듣기 싫은 소음에 가까운 기타 소리였지만 아내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육 개월 정도 꾸준히 치자 슬슬 기타 다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타를 치는 것이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주말에는 무엇에 홀린 듯, 앉은자리에서 여섯 시간 동안 기타를 치기도 했다. 그런 날 보며 아내는 아예 기타리스트로 전업하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실력이 늘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는 진지하게 기타리스트로 전업한 자신을 상상했다.


기타는 내게 큰 힐링이 되어주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나는 취업 문제와 비자 문제, 이민자로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각종 스트레스와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아왔다.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항상 노력했지만 타향살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좌절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마음속의 큰 짐이었다. 그런데 기타를 치는 중에는 그런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나와 기타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타를 잘 치고 못 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타를 치는 행위 자체가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안이 있었다. 그것이 내가 주말에 여섯 시간씩 기타를 잡고 놓지 못하는 이유였다.


일 년이 지나자 나는 제법 그럴듯하게 기타를 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강박적으로 매일 기타를 치지는 않았지만 짬 날 때마다 의자에 걸터앉아 자연스럽게 기타로 손을 뻗었다. 아내가 부르는 노래의 반주도 해 줄만큼 실력도 얼추 늘었다. 


언젠가 나의 아내가 고백하길, 나의 꾸준함에 놀랐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쉽게 싫증을 내는 인간인지 아는 그녀는 내가 길어야 한 달이면 기타를 때려치우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나는 보기 좋게 그녀의 예상을 뒤엎고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 꾸준히 기타를 치고 있다.


비토는 자신이 내게 기타를 선물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사실 그는 기타보다도 훨씬 더 큰 선물을 나에게 주었다. 기타를 치고 있으면 ‘지금’과 ‘여기’라는 시공간이 사라지고 기타와 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기타 줄의 파동만이 남는다. 비토는 나에게 기타와 파동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밀실, 그 안에서 그들이 주는 평화와 위로를 선물했다. 그것은 인터스텔라의 차원과 차원 사이의 간극에만 존재하는 압도적인 정적과 고요였다.


기타를 칠 때면 항상 비토가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만나 아름다운 선율의 평행 우주를 선물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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