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각 Mar 26. 2021

카페 죽돌이의 탄생

비토 이야기 –1–

“부각씨, 축하합니다! 4층으로 올라가면 되는 거 아시죠?”


안내 데스크에 앉은 그랜트 Grant가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등 뒤의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수줍은 미소로 화답한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의 한쪽 벽면에는 ‘올해의 탐험가를 뽑는 투표에 참가하세요’라고 적힌 작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지난 삼 년간 종종 드나들었던 익숙한 건물인데 오늘따라 감회가 새로웠다. 4층에 내려 왼쪽의 유리문을 열고 오른쪽 복도를 따라 걷자 개방형 구조의 익숙한 사무실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목적지가 눈에 들어오자 금발에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머리통이 사무실 파티션 위로 삐죽이 보였다. 80년대 라커처럼 약간 길다 싶은 헤어 스타일에 190 센티미터는 족히 될듯한 덩치를 가리기엔 파티션이 너무 낮았다. 마치 은퇴한 크로아티아 국가 대표 축구팀 수비수가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헤이, 맨! 팀에 합류한 걸 축하해!”


내가 복도를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 비토 Vito가 특유의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사람 좋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가 합류한 것이 진심으로 기쁜 듯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이 사람이 나랑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나 싶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친 것도 잠시 뿐, 나는 그의 초긍정적인 아우라에 휘말려 그의 손을 맞잡고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두어 번 봤던 것뿐인데 마치 불알친구를 이십 년 만에 만난 것 같은 축제 분위기였다.


“오 마이 갓! 부각아, 웰컴!!”


베사니 Bethany가 비토에 질 수 없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회의실에서 뛰쳐나왔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시니어 디자이너였는데 그녀는 어느새 디자인 팀장이 되어 있었다. 베사니와는 그래도 구면이었던 나는 그녀의 괴성에 주파수를 맞추고 함께 환호했다. 건너편 파티션에 앉은 에디터들이 우리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전 내내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고 돌아온 내 손에는 코팅이 매끈한 사원증이 들려 있었다. 반짝거리는 코팅 아래로 내 사진과 이름,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이라고 쓰인 글씨가 선명했다. 내 책상은 비토의 오른쪽 바로 옆자리였는데, 그곳에도 내 이름 석자가 박힌 명패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중학교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퇴근길에 노란색 표지가 눈에 띄는 얇은 잡지를 한 권 가지고 오셨다. 재미있어 보여서 신문 가판대에서 집어 들었다는 말씀과 함께 아버지는 그 책을 내게 건네주셨다. 표지에는 가무잡잡한 얼굴의 어린 남자아이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색감이 다른 잡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화려했다. 노란색 테두리가 번쩍거리던 잡지 표지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생애 첫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흥미롭게 읽었던 나는 이후로도 몇 권을 더 사서 읽었다. 잡지에는 아마존에 사는 원주민부터 유럽의 정세 변화, 태평양 심해의 물고기, 그리고 태양계 너머 저편의 은하계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듯 숨을 죽이며 잡지를 읽던 나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취재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곤 했지만 이내 그들이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곤 했다. 어린 나의 상상 속에서 그들은 헐리웃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실체가 아닌 환상에 가까운 존재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십 년이 지나 바로 그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 사무실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너무 좋아서 꿈만 같다기보다는 사원증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정말로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기에 꿈만 같았다.


“부각아, 밥 먹자.”


몽상에 취해 허공을 응시하고 앉은 내게 비토가 말했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 오십 분이었다. 밥 생각에 현실로 복귀한 나는 비토의 뒤를 따라 쫄래쫄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샌드위치 먹지?”


나는 그걸 안 먹는 사람도 있냐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토는 매일 가는 가게인 듯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사무실 옆 건물 일층에 있는 작은 카페로 나를 데려갔다. <시티 플레이스 카페 City Place Cafe>라고 적힌 평범한 간판 아래 가게는 주변 사무실에서 나온 회사원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토는 이곳 단골인 듯 가게 사장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걸 넣고 저걸 빼고 한참 주문을 외우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가게 사장에게 비토와 같은 걸로 달라고 말했다.


잠시 후 토스트 사이에 끼워진 참치 샐러드 샌드위치를 하나씩 받아 든 우리는 카페 앞의 노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위의 시원한 파라솔이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햇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백악관에서 도보로 십분 거리의 카페 노천 테이블에 앉아 참치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와중에 문득 내가 유럽 어느 도시의 한적한 뒷골목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보면 유럽이나 미국이나 엇비슷하다고 느낄수도 있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꽤나 크다. 전자를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비유한다면, 후자는 헬레니즘 양식을 베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그리스 신전의 역사적 가치를 찬양하고 베가스 호텔의 키치함을 놀려대지만, 어디서 하룻밤 자겠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라스베가스 호텔을 택할 것이다. 유럽과 미국은 그렇게 다른 것 같다.


나중에 차차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국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유럽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비토 덕분이었다. 크로아티아의 전신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비토는 약 십육 년 전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을 한 유럽인이었다. 삼십대 초반에 미국으로 건너온 탓에 비토는 많은 부분에서 유럽식 사고와 행동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의 섬세한 취향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Washington D.C.에서도 최대한 유럽과 비슷한 대체품을 찾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카페도 미국의 평범한 샌드위치 가게와는 조금 다른 맛과 메뉴,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이는 그 가게의 사장 역시 유럽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노천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는 일은 꽤나 유럽식 생활방식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샌드위치를 사서 사무실로 가지고 간 뒤, 자기 자리에서 먹곤 한다. 특히 미국 직장인들은 맛있는 것을 점심으로 먹을 생각이 없는 듯 항상 지루하고 같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점심을 때우기가 일쑤였다. 반면 미식가에다가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천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는 비토를 보면서 새삼 유럽과 미국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느끼곤 했다.


사무실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한국에서 왔기에 나는 비토의 노천카페 라이프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점심시간이 되면 사무실을 나와 시내 이곳저곳을 돌며 맛집과 노천카페를 찾아다녔다. 사무실 동료들도 머지않아 나와 비토가 함께 나가 식사를 하는 것을 당연한 일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비토와 나는 그렇게 급속도로 친해졌다.


비토와 나는 열두 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지만 죽이 잘 맞았다. 둘 다 서른 살 무렵에 미국에 건너온 탓에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기보다는 크로아티아인과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유럽과 한국이라는 뿌리 깊은 문화적 토대 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미국 문화의 알팍함을 찾아 놀리는 것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우리는 미국의 식생활 문화가 한국과 유럽에 비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놀리면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각자가 미국에 건너온 이유도 비슷했는데, 짧게 요약하자면 각각 크로아티아와 한국에서 실망스러운 사건들을 경험한 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대화를 하면 할수록 비토와 나는 점점 더 맞장구를 치는 횟수가 늘어갔다.


허겁지겁 점심을 먹으며 미국 직장인처럼 일해왔던 내게 비토의 노천카페 점심은 분명 신선한 환기였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신선함은 식사 후에 찾아왔다. 식사를 마친 비토는 내게 길 건너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특별히 충격적이진 않았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비토는 노천카페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어느 카페로 나를 데려갔다.


카페 종업원들이 비토에게 아는 체를 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도 그가 단골로 오는 장소인 듯했다. 비토는 몇 마디 잡담을 건넨 뒤 코르타도 cortado를 주문했다. 얼마 뒤 비토의 코르타도와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커피를 집어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내게 비토가 잠시 앉았다 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컵 대신 예쁜 카푸치노 잔이 들려 있었다.


비토는 기가 막히게 노천카페를 찾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비토를 기다렸다는 듯 빈 노천 테이블들이 카페 앞에 깔려 있었다. 그는 코르타도가 든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아메리카노가 든 일회용 컵을 든 나도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비토는 말없이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따금 잔을 들어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에서 그가 정신줄을 놓은 게 아님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사실 별로 안 친한 아저씨 둘이 노천카페에 앉아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비토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내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부분은 비토와 내가 카페에 무려 한 시간을 앉아 커피를 마셨다는 점이었다. 열두 시부터 삼십 분 정도 점심을 먹고 한 시간 동안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으니 대략 한 시간 반 정도를 점심식사에 쓴 셈이었다. 어차피 정해진 기간 안에 주어진 일만 하면 되는 자리인지라 특별히 급할 것은 없었지만 비토의 태도에는 어느 직장인으로부터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여유가 흘러넘쳤다.


홀린 듯 비토를 따라 점심식사와 커피를 매일 함께하던 나는 어느새 비토의 점심 패턴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급기야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금단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앞장서 비토를 카페로 데려가고 있었다. 비토와 나의 상사인 베사니도 비토의 이런 패턴을 잘 알고 있는 듯, 가끔 비토에게 문자를 보내 들어오는 길에 커피를 사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사실 비토와 베사니는 입사 동기였기 때문에 둘은 꽤나 친한 듯했다. 게다가 그녀는 일만 제시간에 마치면 중간에 뭘 하든 상관없다는 주의였고, 비토와 나에 대한 엄청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점심 식사 후 비토와 함께 노천카페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모바일 디자인부터 마크 노플러 Mark Knopfler의 음악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주제로 떠들곤 했지만 때로는 삼십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기도 했다. 충분히 멍을 때렸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주섬주섬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해보면 당시의 날들이 꿈만 같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일했었다는 사실보다는 비토와 함께 햇살이 눈부신 초가을 노천카페에 멍하니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꿈만 같다.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커피잔들을 앞에 두고 비토로부터 삶을 관조하는 법을 배웠다. 멍하니 뒷마당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날이면 가끔 비토가 그리워진다.




이전 08화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던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