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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Feb 08. 2021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던 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육 년 전, 을씨년스러운 겨울비가 흩뿌려져 내리는 새해의 첫 번째 토요일이었다. 우리의 잿빛 고물 중고차는 평소 우리가 다니지 않는 셰이디 그로브 Shady Grove (으슥한 숲이라는 의미가 있다)의 어느 한적한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누가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듯 흩어져 떨어지는 먼지 같은 빗방울, 안개인지 구름인지 아니면 차 앞 유리창에 묻은 얼룩인지 알 수 없는 뿌연 이물감은 음침한 동네 이름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고 있었다. 곧 정오가 된다고 하기에는 하늘이 심하게 어두웠다.


“<슬리피 할로우 Sleepy Hollow>에서 목 없는 유령이 말 타고 달리던 숲 속 같은데.”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심각해지는 아내의 표정을 보며 나도 입을 다물었다. 새해 첫 주말인데 묘한 긴장감이 차 안에 흐르고 있었다. 누구도 라디오를 켤 생각을 하지 않은 탓에 차 안에는 회색 구름이 꽉 찬 것 같은 답답함이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내비게이션의 방해공작을 겨우 뚫고 도착한 목적지에는 낮고 넓게 펼쳐진 일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무거운 회색 하늘이 건물을 꾸욱 누른 것처럼 건물은 그 거대한 넓이에 비해 너무 낮아 보였다. 건물 주변으로는 놀이동산에나 있을법한 대형 야외 주차장이 건물을 압박하듯 감싸고 있었는데 주차된 차는 열 대가 채 되지 않았다.


빵에 발린 땅콩버터처럼 건물이 땅에 넓게 펴 발린 상태였기에 들어가는 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건물 주변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겨우 입구를 찾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들어갈 준비 됐니. 우리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문을 열어젖혔다.


알 수 없는 동물의 털 비린내와 따뜻한 히터 냄새가 훅하고 한꺼번에 코를 찔렀다. 너무 많은 정보가 동시에 후각으로 입력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내조명은 꽤 밝은 편이었지만 벽 색깔 때문인지 충분히 밝지 않은 듯 보였다. 낮은 천장 덕분에 방 안의 분위기는 아늑한 편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애써 밝아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태생적 한계 때문에 어두울 수밖에 없는 회색 같은 느낌이 이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느껴졌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제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따뜻하게 웃는 얼굴로 현관에 서 있는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몽고메리 카운티 경찰 Montgomery County Police’이라고 쓰여있는 제복이 그녀의 따뜻한 인사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나는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 고양이 있나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서 사무실 뒤편의 오른쪽 철문을 향해 걸어갔다. 현관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따뜻한 미소를 흐트러짐 없이 유지한 채 그녀는 망입 유리가 끼워진 철문을 열고 우리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막 끝나서 몇 마리 남지 않았네요.”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하는 우리의 본 표정을 본 그녀가 덧붙였다.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이 동물을 입양하러 가장 많이 오거든요.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남아있는 동물들이 거의 없답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아이가 없으시면 한 두 달 정도 있다가 다시 오셔도 괜찮아요.”


크리스마스가 반려동물 입양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 사무적인 내용을 따뜻한 목소리로 말해주는 그녀 덕분에 충격이 조금은 덜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왔다. 엄청나게 넓고 낮은 천장을 가진 방 안은 삼단으로 쌓아 올린 고양이 우리로 가득 차 있었다. 동물 실험을 하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과학 실험실 같았다. 책장 대신 동물 우리로 가득 찬 도서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양이들의 안정을 위해서인지 방 안의 모든 조명은 꺼진 상태였다. 한쪽 벽을 따라 쭉 들어찬 창문들만이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햇빛 대신 생쥐 털 같은 회색이 들어오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내려다 보니 맨 아래 칸에서 작고 귀여운 솜방망이 같은 손이 철창 사이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철창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솜방망이를 불렀다. 힘이 넘치는 새끼 고양이가 마구 앞발을 휘저으며 내 손을 때렸다. 발톱을 깎지 않은 탓에 고양이가 나를 때릴 때마다 핀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찌나 귀여운지 도저히 철창 밖으로 손을 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안타깝게도 선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맹렬하게 앞발을 휘젓는 것이지요.”


이런 비극적인 코멘트에 미처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우리는 급격히 침울해졌다. 우리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은 듯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크리스마스 직후라 남은 고양이가 몇 마리 없답니다. 특히 생후 6개월 안팎의 새끼 고양이는 이 불쌍한 아이 말고는 한 마리도 없어요. 사람들이 나이 든 고양이보다 새끼 고양이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을수록 입양이 어렵거든요.”


그녀는 마음에 드는 고양이가 없으면 나중에 다시 와도 괜찮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없이 서 있는 우리에게 편하게 둘러보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사뿐히 방을 나갔다. 등 뒤에서 철그렁하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아내는 침묵한 채 도서관 책꽂이 같이 쌓여있는 텅 빈 쇠창살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 대부분의 철창 안은 비어있었다. 명절의 도서관보다는 명절의 비디오 대여점이 더 맞는 비유 같은데. 넷플릭스 덕분에 요즘 비디오 대여점은 이보다 더 우울할 수도 있겠지.


빈 철창 사이로 쓸데없는 공상이 이어지던 중, 왼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노란색 치즈 고양이 한 마리가 통밀 식빵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있었다. 안녕? 나의 반가운 인사에도 고양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나 같은 녀석들은 하도 많이 봐서 지겹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이래서 입양 되겠니. 몇 번의 인사 시도 끝에 대답 없는 그 녀석을 두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회색이 가득 찬 고양이 도서관 안쪽에는 두 개의 작은 방이 더 있었다. 각각의 방은 한 평 남짓한 작은 크기였는데, 안이 들여다 보이도록 커다란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각 방에는 어림잡아 일곱 마리 안팎의 고양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철창은 보이지 않았다. 방 자체가 고양이 우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오른편 문을 열고 들어가자 크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도도한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아하게 캣타워를 내려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털은 꽤 긴 편이었는데 페르시안 블루와 검은 고양이 잡종 같았다. 고양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다가오더니 나의 다리 사이를 오가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네요.”


어느새 나타났는지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따뜻한 미소의 그녀가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암컷 고양이가 보통 이렇게 살갑게 사람을 대하지 않는 편이라면서 고양이가 특별히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그 고양이가 싫지는 않았지만 열 살 정도 되는 많은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오래도록 같이 살 수 있는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나이 어린 고양이를 죄다 입양해 간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왼쪽 방을 둘러볼 차례였다. 이 곳에도 마음에 드는 고양이가 없으면 오늘은 고양이를 입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문을 열자 작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목줄에는 보라색 태그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고양이를 안아 올려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얌전하고 순한 그 고양이는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친구는 얌전하고 조용한 친구랍니다. 보라색 태그가 달려있는 친구들은 다 순하고 조용한 성격이에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모든 고양이들의 목에는 각기 다른 색의 태그가 달려 있었다. 방 안에는 보라색 태그를 단 고양이들이 가장 많았고 오렌지색 태그를 단 친구들도 몇 마리 보였다. 고양이들의 성격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 신기했다.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자 회색 줄무늬가 멋지게 빠진 고양이 한 마리가 내 키 만한 캣타워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녹색 태그는 처음 보는데. 녹색은 무슨 의미인가 궁금해하면서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고양이가 자신의 앞발로 갑자기 내 머리를 쥐어패기 시작했다. 아야야야!


“그 녀석은 대장 고양이예요. 독립심도 강하고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은 녀석이랍니다.”


아니, 그런 건 조금 미리 알려주셨어야죠. 눈 깜짝할 사이에 야옹이에게 줄펀치를 얻어맞은 나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사나운 녀석보다는 아까 보라색 태그를 한 고양이처럼 얌전한 친구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보라색 태그를 단 검은 고양이가 마음에 드는데요. 이 친구는 몇 살인가요.”


그녀는 한 살 안팎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서류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몇 마리 남지 않는 고양이들 사이에서 그래도 얌전하고 귀엽게 생긴 녀석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큰 문제가 없는 한 이 녀석을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고양이는 아까 내가 내려준 자리에 그대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전형적인 고양이처럼 너무도 조용했다.


얼추 마음을 정하고 비좁은 방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아~ 야아~ 야아~옹 하는 절박하면서도 집요한 소리였다.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구석에 앉아있는 또 다른 검은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는 오렌지색 태그를 달고 있었는데 우리가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렌지색 태그를 단 고양이는 몸집이 꽤나 작고 왜소했다. 게다가 다른 고양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지 그 좁은 방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와중에도 다른 고양이들을 최대한 피해 살금살금 걸어왔다. 어렵게 내 발 밑에 도착한 그 고양이는 뒷다리를 접고 내 발 앞에 앉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다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야아~~ 야아~~ 야아아~~


이 녀석이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왜소한 검은 고양이는 나와 아내가 방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리에게 오고 싶었지만 다른 고양이들이 무서워 오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떠나려는 사실을 직감하고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방구석에 찌그러져 지내지만 어쩌면 이 순간이 보호소를 나갈 유일한 기회임을 눈치챘던 것일까. 대장 고양이의 보복이 두려웠을텐데 용케도 온몸의 용기를 끌어모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감기에 걸려 코를 질질 흘리고 있는 고양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나와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털에 묻은 누런 콧물이 녀석의 지저분함을 극대화해주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털은 윤기가 없이 뻣뻣했다. 새끼 고양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아직 머리에 약간의 배냇털이 남아 있는 듯했다.


“어머, 얘 좀 봐. 우리한테 자기 좀 데려가라고 우는 것 같지 않아?”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보라색 태그를 한 검은 고양이 서류를 들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 우리는 오렌지색 태그를 단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어머, 그 고양이가 아닌데요.”


우리가 엉뚱한 고양이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요. 저희는 이 고양이를 데려가고 싶어요.”


그녀는 우리가 안은 고양이를 받아서 안아 들더니 조금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도 사랑스러운 고양이죠. 음, 그런데 이 녀석 조금 수다스러운데 괜찮으시겠어요? 많이 울거든요.”


“이미 우는 모습 충분히 봤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수다쟁이 고양이를 품에 안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며 방을 나갔다. 그녀는 고양이를 처음 키우는 우리가 미덥지 않은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이 녀석, 꽤 수다스러운 친구예요. 너무 시끄러운 고양이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혹시라도 나중에 고양이가 너무 시끄러워서 못 키우겠다고 생각되시면 다시 여기로 데려오시면 돼요.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 없고요, 정말 괜찮으니깐 길에 버리지 마시고 꼭 여기로 데려오세요.”


대체 얼마나 수다스러운 고양이길래 이리도 신신당부를 하는지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우리는 그럴 일 없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수다라면 꽤나 자신 있는 나와 아내에게 오히려 딱 어울리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이 고양이는 열 달 된 암컷이네요. 보호소에서는 파이퍼 Piper라고 불렀는데 새 이름을 지어주셔도 돼요.”


그녀는 파이퍼가 길고양이가 아닌 집고양이라고 했다. 파이퍼의 엄마가 한 번에 너무 많은 새끼를 낳은 탓에 다 기를 여력이 안되었던 주인이 파이퍼를 비롯한 새끼 몇 마리를 보호소에 맡긴 것이라고 했다. 태어난 지 넉 달 정도 된 시점에서 보호소에 왔으니 파이퍼는 어림잡아 육 개월 정도 이 보호소에서 산 것이다. 어린 나이부터 엄마와 떨어져 살았다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데려가시면 한 달 내로 동물병원에 가셔서 기본 검진을 한 번 받게 해 주세요.”


콧물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헤르페스 같은 치명적인 병은 아닌 것 같고 단순 감기 같지만 그래도 병원에 한 번 데려가서 검진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녀는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을 할 경우 제휴 병원에서 첫 번째 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면서 동물 병원의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파이퍼를 안고 있는 경찰관의 어깨 위로 파이퍼가 침과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검은 털 덕분에 콧물이 더욱 반짝거리며 돋보였다.


“그런데 여기 검은 고양이가 유독 많은 이유가 있나요?”


파이퍼의 번들거리는 콧물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내가 물었다. 한 시간 째 우리의 입양을 도와주던 그녀는 사실 검은 고양이가 고양이들 가운데 가장 인기가 없는 종류라고 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검은 고양이를 마녀라고 생각해 재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끝까지 선택받지 못하고 남아 있는 방 안의 수많은 검은 고양이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크리스마스가 일 년에 다섯 번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은 고양이가 어두운 털 색깔 덕분에 숨기에도 용이하고 먹이를 잡을 때도 유리한 관계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했음에도 말이다. 또한 검은 고양이는 사실 성격이 좋고 애교가 많은 종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서류 작업을 마친 그녀는 콧물을 질질 흘리며 울어대는 파이퍼를 작은 케이지 안에 고이 안아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입양비로 백 달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시립 동물 보호소에서 돈을 받고 동물을 주는 줄 몰랐다고 하자 그녀는 정책적으로 입양비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돈을 받지 않고 동물을 분양하면 사람들이 그 동물을 다시 쉽게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입양비는 필수라고 했다.


그녀는 일주일 정도 지난 다음 파이퍼의 사진을 몇 장 찍어 자신의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입양한 사람들이 잘 키우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덧붙여, 고양이를 키우기 힘들면 꼭 여기로 데려오라고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쭈구리 파이퍼 시절




물안개처럼 내리는 가랑비는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었다. 잿빛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지독한 잿빛이 되어 있었다. 인터넷 선행학습을 통해 고양이가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나는 최대한 천천히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운전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 아무것도 없잖아.”


과연 집에는 고양이 용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집으로 가면 고양이가 손가락만 빨면서 쫄쫄 굶을 판이었다. 우리는 동네에서 제일 큰 반려동물 용품 가게로 차를 돌렸다. 고양이만 차에 두고 내리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에 가게에는 나 혼자 들어가기로 했다.


펫코 Petco에 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국에서 오 년을 살았지만 한 번도 들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렇게 큰 매장에서 무얼 파는지 궁금했는데 들어와 보니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개와 고양이 먹이 및 장난감은 물론 열대어와 이구아나, 심지어 악어와 뱀을 위한 먹이도 있었다.


필수품만 골라 한시바삐 집으로 가서 고양이와 놀고 싶었던 나는 잰걸음으로 고양이 사료 코너로 향했다. 건사료 한 가지와 습사료 한 가지를 사라고 했겠다. 최대한 빨리 아무거나 고를 생각이었던 나는 사료 코너의 거대한 컬렉션을 보고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곳에는 어림잡아 백개가 넘는 종류의 고양이 사료가 있었다. 대형마트 과자 코너도 이렇게 크진 않은데, 무엇을 먹여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나는 가장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아이앰스 Iams의 아기 고양이 건사료를 집어 들었다. 습사료는 고민 끝에 낱개로 파는 캔을 종류별로 하나씩 골라서 샀다. 작은 고양이 간식도 한 봉지 집어 들었다. 뒤이어 고양이 화장실과 모래, 그리고 오뎅 장난감을 닥치는대로 집어든 나는 회색 공기를 뚫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는 내내 차 안에서 파이퍼가 울어댔다. 야아~~ 야아~~옹~


집에 돌아온 우리는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과연 고양이가 우리 집을 마음에 들어할까. 조심스럽게 차에서 꺼낸 케이지를 거실 한 구석에 내려놓고 슬며시 문을 열었다. 극도로 긴장한 고양이는 케이지 안에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미 사전 조사를 통해 고양이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지식과 감정은 별개의 문제였다. 조바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케이지 입구만 쳐다보면서 새해의 첫 토요일 오후가 가버렸다.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며 나와 아내는 고양이의 새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파이퍼도 나쁜 이름은 아니었지만 동물 보호소의 기억을 다 잊고 새 출발 하자는 의미에서 새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검은색이니깐 블랙 타이거 어떨까. 찬성 한 표, 반대 한 표로 첫 번째 안은 부결되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는 어때. 또다시 부결. 고영희 어떨까. 부결. 흑표 어때. 부결. 흑임자. 부결. 부결, 부결, 부결.


한 시간 째 수준 이하의 난상 토론을 벌이던 와중에 ‘심바’로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라이온 킹>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그 맹수 이름으로 하는 게 어떨까. 너무 대놓고 따라 하는 것 같다는 점에서 결국 부결되었지만 좋은 시도였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특히 왜소하고 연약해 보이는 고양이를 위해 ‘라이온 킹’처럼 강렬한 이름을 지어주자는 취지에서 ‘심바’라는 작명 의도가 괜찮았다는 점에 우리는 공감했다.


“그러면, 심바 동생이라는 의미에서 ‘쌈바’ 어때?”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아내가 갑자기 크게 반응했다.


“쌈바 좋은데? 심바 동생 쌈바... 그래, 쌈바로 하자. 쌈바!”


마치 자기 이름이 맞다고 동의하기라도 하듯, 쌈바가 케이지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쌈바!’를 외치며 왜소하고 연약해 보이는 어린 고양이를 향해 뛰어갔다. 쌈바야, 우리가 누구보다 널 행복하게 해 줄게! 마음속으로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좁은 케이지에서 기어 나온 쌈바는 잔뜩 웅크린 채 이곳저곳 잠시 냄새를 맡더니, 안심이 된 듯 갑자기 크게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어어, 왜 이렇게 길지


“잠깐만, 얘 아까 그 고양이 맞나?”


“어라, 그러게. 아깐 분명히 쭈구리 같이 생겨서 작고 연약해 보였는데, 왜 이렇게 커졌지?”


기지개를 켜는 쌈바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대혼란에 빠졌다. 동물 보호소에서 다른 고양이들을 피해 다니면서 구슬프게 울 때는 분명 엄청 작아 보였는데 막상 집에 데려다 놓고 보니 전혀 작은 체구가 아니었다.


“세상에, 얘 왜 이렇게 길지? 지윤이네 고양이 보다도 더 큰 것 같지 않아?”


쌈바가 서전트 점프를 시전하더니 한 번에 거실에서 가장 높은 책장 위로 뛰어올랐다. 킁킁거리며 책장 위의 냄새를 맡는 모습이 늠름하기 짝이 없었다.


“얘가 집에 다른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안 것 같아. 갑자기 활개를 치기 시작했는데.”


새로 입양된 고양이는 적게는 일주일에서 많게는 한 달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그것도 쌈바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그 날 저녁 쌈바는 오뎅 장난감을 쫓아 입에 거품이 나도록 뛰어다니다가 아기 고양이용 건사료를 배불리 먹고 우리 침대 발치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쌈바는 필라테스용 짐볼을 터뜨리고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품을 박살냈으며, 쌀가마니를 찢어 용맹을 과시했다. 서랍을 열어 사료와 간식 봉지를 뜯어 내용물을 먹어치우는 통에 우리는 서랍에 자물쇠를 달아 먹이를 사수해야 했다. 하루하루 갈수록 다양한 것들을 요구하며 야옹대기 시작했고, 밤마다 오뎅 장난감을 물고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사냥 실력을 자랑했다.


쌈바를 입양한 뒤 우리는 쌈바 걱정에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 없게 되었다. 너무 어린 시절 엄마와 떨어진 탓인지 우리가 장기간 집을 비우면 약간의 분리 불안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도도하고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통념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개보다 표현력이 떨어지는 고양이를 보고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한 것일 뿐, 실제 고양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쌈바를 보며 알게 되었다. 오히려 고양이의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한 뒤로는 고양이가 얼마나 살가운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특히 쌈바는 많이 우는 만큼 표현력이 좋고 의사표현이 적극적이라 가끔 내가 개를 데려 온 것인지 고양이를 데려온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 덕분에 쌈바는 우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작금의 상황에 매우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작년에 새로 바꾼 습사료에 대체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얼마 전 새로 구매한 간식을 보면 환장한다. 지난 1월 3일은 쌈바 입양 6주년 기념일이었다. 검은 고양이 쌈바는 다음 달 일곱 살이 된다.


이제는 여유만만한 집주인이 된 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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