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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Jan 13. 2021

퍼로기와 지티

열 평 남짓한 작은 원룸을 종종걸음으로 가로질러 뛰어간 나는 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조이 Joey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웃으며 서 있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 코트니 Courtney도 조이의 팔짱을 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헤이, 조이! 드디어 왔구나, 어서 들어와!”


두 명이 앉으면 꽉 차는 거실에 네 명이 들어앉자 집은 금세 비좁아졌지만, 우리 부부의 아파트는 오랜만의 손님으로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었다.


“지난번에 네가 불고기를 해줬으니까 오늘은 약속대로 내가 음식을 준비해왔어. 기대해도 좋아!”


조이와 코트니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떠먹는 그리스식 요거트와 정체불명의 냉동식품 한 봉지였다. 잠시만 기다리라며 우리 집 주방을 점령한 조이와 코트니는 얼마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을 접시 한가득 가져왔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조이는 우리에게 음식을 권했다.


접시에 있는 음식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만두였다. 익숙하지만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미지의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조이가 나를 가로막았다.


“그거 여기 요거트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어.”


그는 초바니 Chobani 브랜드의 그리스식 플레인 요거트를 가리켰다. 만두를 요거트에 찍으라니,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권유를 믿고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비위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리스식 요거트의 특징은 일반 요거트에 비해 유제품 특유의 냄새가 덜한 대신, 좀 더 되직하고 거친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거친 질감의 요거트에 만두를 푹 찍어 한 입 베어 문 나는 그 맛에 몹시 놀랐다. 의외로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약간 뻑뻑한 듯 느껴지는 그리스 요거트의 차가운 질감 아래로 겉면의 따끈한 밀가루 피가 바삭하고 고소하게 씹혔다. 안쪽은 곱게 간 감자와 치즈가 고르게 뒤섞여 부드러운 크림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맛이었다. 이 맛있는 음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따뜻한 퍼로기 위에 잘 구운 양파 가니쉬를 얹어 그리스 요거트에 푹 찍어 먹으면, 아흑 맛있다 Image from bluejeanchef.com


“이건 퍼로기 pierogi야. 아니, 피로기인가? 퍼로기? 피에로기? 아무튼 맛있지?”


조이도 정확한 음식의 발음은 잘 모르는 듯했다. 잠시 후 퍼로기라고 마음을 정한 조이는 이 음식이 폴란드에서 즐겨 먹는 음식의 하나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한국의 만두와 퍼로기를 비교하면서 순식간에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나와 조이는 디자인 스쿨 같은 학년의 친구였다. 조이는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새내기들에 비하면 많은 나이였다. 그도 나처럼 대학을 졸업한 뒤 진로를 바꾸어 디자인 스쿨에 다시 진학한 케이스였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사려 깊은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였다. 조이는 훤칠한 외모와 친절한 매너를 갖춘 덕분에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인기가 좋았다.


우리는 가끔 서로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조이는 내가 만든 불고기를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덕분에 나는 메뉴 고민을 할 필요 없이 그를 우리 집에 초대하곤 했다. 음식을 만들어 먹을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미국에 비하면 으리으리하게 발달해 있는 한국의 식문화 덕분에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보통 선조들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잘 모른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선조들의 출신지에 대한 소속감보다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큰 탓일 것이다. 조이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순수 미국인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탈리아계 혈통이었다. 그의 먼 선대 조부모님들 중 누군가가 오래전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했을 것이다. 함께 음식을 먹을 때면 그는 이례적으로 이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아내와 나에게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때로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언젠가 조이가 오르조 orzo (쌀알 모양의 파스타) 요리를 만들어 준 덕분에 그 후 우리는 오르조 요리를 직접 만들어 즐겨 먹게 되었다.




뉴저지 New Jersey를 배경으로 한 HBO의 <소프라노스 Sopranos>는 아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였다. 환상적인 각본과 연출, 능청스럽게 자연스러운 연기, 냉소적이면서도 눈물 나게 웃긴 에피소드들 덕분에 생전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날 수 있을지 걱정할 정도로 우리는 <소프라노스>를 사랑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던 뉴욕과 이웃한 뉴저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벌어지는 탓에 드라마에 대한 몰입감도 상당했다. 우리는 2007년에 종영한 이 드라마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았다.


워낙 인상적인 장면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아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카멜라 Carmela가 만드는 베이크드 지티 baked ziti였다. 이탈리아계 마피아 보스인 토니 소프라노 Tony Soprano의 아내 카멜라는 종종 지티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러면 밖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온 토니는 냉장고를 열고 차게 식은 지티를 숟가락으로 퍼 먹으며 신문을 읽곤 했다.


갓 구운 지티의 바삭한 치즈 겉면 아래로 토마토 마리나라 소스와 이탈리안 소시지가 쫄깃한 페네 파스타와 어우러져서, 아흑 맛있다 Image from jessicagavin.co


어느 날 <소프라노스>를 보던 아내가 돌연 지티를 만들어 보겠다면서 홀연히 집을 나갔다. 잠시 뒤 아내는 동네 마트에서 이것저것 처음 보는 재료들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한동안 레시피와 씨름을 하던 그녀는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븐에 무언가를 굽기 시작했다. 삼십 분 정도가 흐른 뒤 어디선가 모락모락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각종 치즈와 이탈리안 소시지, 마리나라 소스와 페네 파스타가 한데 엉켜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미였다. 처음으로 지티를 먹은 날이었다.


지티를 먹고 있자니 몇 년간 얼굴을 보지 못한 조이가 문득 생각났다. 조이는 당시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내와 나를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고마운 친구였다. 퍼로기와 오르조를 가지고 우리 집에 올 때면, 그는 잠시 미국인에서 이탈리아 이민자로 둔갑해 외로운 이민자인 우리 마음을 달래주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조이가 영화 <갱즈 오브 뉴욕 Gangs of New York>에 나오는 이탈리아 이민자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와 알 수 없는 연대 의식을 느끼곤 했다.


지난 십 년 간의 미국 생활에서 나의 기억에 진하게 남은 음식들은 햄버거와 텍사스 바비큐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 같은 어느 이민자가 오래전 고향에서 가져온 퍼로기와 오르조, 그리고 지티였다. 언젠가 불고기 레시피를 찾고 있는 폴란드 이민자를 만나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가장 맛있는 나만의 불고기 레시피를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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