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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Nov 06. 2020

꼬치구이와 맞바꾼 꿈의 직장

새해 첫 주라 그런지 출근 시간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따뜻해 보이는 빨간 터틀넥 스웨터에 코발트색 스키니진을 입은 그녀는 맞은편 좌석에 앉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과 백팩을 엉성하게 쥔 채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있는 모습이 출근길에 늦어 급히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그녀가 지하철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상큼한 머릿결과 상기된 얼굴을 몰래 훔쳐보던 나는 그녀가 내게로 시선을 돌리자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움직였더니 숙취가 가시지 않은 탓에 골이 깨질 듯이 아팠다. 다행히 삼십 분 남은 면접 시간에는 맞추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그동안 술이 깰 것 같지는 않았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이리저리 숙취 가득한 얼굴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그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힘겹게 지하철에 좌석에 기대어 앉아 매력적인 그녀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보람찬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커피를 든 그녀의 가늘고 긴 손 끝은 뜨거운 컵 때문인지 스웨터보다 밝고 연한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별안간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지하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마터면 역을 놓칠 뻔했나 보다. 순간, 하우스톤 스트리트 Houston St.라고 쓰여있는 역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토할 것 같은 속을 부여잡고 그녀의 뒤를 따라 출발하려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도 여기 근처의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가 보다. 나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열차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탓에 십오 분 정도 시간이 남을 것 같았다.


십 층 정도 되어 보이는 붉은 벽돌의 회사 빌딩은 걸어서 일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보이지 않아 나는 문 앞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흐릿한 하늘 아래 한겨울 공기는 차가웠다. 칼바람 탓에 술이 어느 정도 깨는 듯했다.


빌딩 현관 앞에 덜덜 떨면서 서 있으니 설렁탕을 사주던 정훈 선배의 얼굴이 생각났다. 형, 내가 신년 벽두부터 맨해튼 뒷골목에 덜덜 떨면서 서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형 때문이야. 이게 다 형이 시켜서잖아.


빌딩 현관 앞에 덜덜 떨면서 서 있으니 설렁탕을 사주던 선배의 얼굴이 생각났다. Photo by Lerone Pieters on Unsplash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도 이렇게 추운 어느 겨울날 오전이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유학을 준비하면서 작별 인사라도 할까 하는 마음에 선배가 일하고 있는 을지로의 어느 큰 빌딩에 찾아갔었다. 바쁜 프로젝트 와중에 점심시간을 쪼개어 나를 보러 나온 선배는 나를 끌고 회사 근처 아무 데나 있을법한 설렁탕집으로 들어갔다.


“와, 노정훈 출세했네. 군대 가기 전에 신촌에서 알탕 먹고 도망간 게 엊그제 같은데, 설렁탕을 사준다고?”


“이 새끼 죽을라고, 형한테 존댓말 안 쓰냐.”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높이 쳐들었지만 그도 은근히 반가운 눈치였다. 설설 기는 시늉을 하는 내게 정훈은 짐짓 정색을 하며 물었다.


“너, 디자인 배우러 유학 간다고?”


응원을 해주는 사람만큼이나 걱정하거나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긴장한 채 기다렸다.


“축하한다. 가서 성공해라.”


막말과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그 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응원해줬다. 자기도 집안에 빚이 많지 않았으면 당장 회사 때려치우고 디자인 공부하러 유학 갔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정훈 선배가 만화 그리는 걸 좋아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난데없이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마침 나온 뜨끈한 설렁탕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아이디오 IDEO라고 알아?”


국밥을 씹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나를 보며 그는 중요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아이디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며 그는 이 회사에 대해 최대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한참 열변을 토해낸 그의 말에 따르면 한마디로 아이디오는 세계 최고의 디자인 회사였다. 아울러 그가 디자인을 전공한다면 가장 가고 싶은 회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곧이어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다짐이라도 받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너 디자인 스쿨 졸업하면 꼭 아이디오 가서 성공해라.”


그렇게나 좋은 회사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 그는 무조건 거기 가서 성공하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진지한 기세에 눌려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는 안심이라도 한 듯 평소와 같은 실없는 농담을 섞어가며 남은 설렁탕을 마저 비웠다. 우리는 짧은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다.




그가 말했던 바로 그 아이디오가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무사히 뉴욕의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나는 이제 아이디오에 가서 성공하기만 하면 오 년 전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풍스러운 소호 SoHo의 벽돌 건물 아래서 감상에 젖어있던 나는 이내 한겨울 추위에 못 이겨 건물로 들어섰다.


로비의 안내 데스크를 통과해 10층으로 올라간 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자신을 디자인 팀장이라고 소개한 40대 중반의 남성은 나를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다. 면접을 위해 디자인 팀에서 한 사람이 더 합류할 예정이라 우리는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잠시 후 빨간 스웨터와 코발트색 스키니진을 입은 그녀가 아까 마시던 커피를 손에 들고 나타났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밝은 미소와 함께 제시카 Jessica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그녀가 건넨 명함에는 ‘제시카 킴, 선임 디자이너 Jessica Kim, Senior Designer’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한국계 성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나처럼 한국에서 유학을 와 취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설레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 이름이 쓰여있는 내 이력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나를 알아보려나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눈치를 보았지만 딱히 나를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도 더 이상 발그레한 핑크빛이 아니었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디자인 포트폴리오 발표를 위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디자인 포트폴리오 파일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내 포트폴리오 홈페이지에 접속하려고도 시도해봤지만 회사 무선 인터넷 망에는 외부인이 접속할 수 없었다. 당황한 나에게 팀장은 웃으며 자신의 노트북을 건네주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팀장의 노트북을 넙죽 받아 발표를 시작했다.


발표를 시작한 지 10분이 채 안되었을 무렵, 눈에 띄게 지루함을 감추지 못하는 팀장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제시카는 내게 응원이라도 보내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녀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내 발표는 내가 들어도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면접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누군가 내 머리와 위장을 전기 충격기로 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숙소에 기어들어가 면접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친구를 만나 술집에 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학수를 만난 것은 오후 여섯 시가 채 되지 않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네 시가 조금 넘어 도착하는 워싱턴발 뉴욕행 기차에서 내린 나는 오랜만에 맨해튼 구경도 할 겸, 한가롭게 미드타운을 거닐다가 약속 장소인 세인트 막스 St. Marks에 도착했다. 마침 퇴근한 학수도 세인트 막스에 도착한 터라 우리는 곧바로 술집으로 향했다.


빌리지 요코초 Village Yokocho는 세인트 막스 최고의 이자까야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맛도 흠잡을 데 없지만, 주방 앞에 있는 바에 앉아 온갖 종류의 요리가 나오는 것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그럼에도 대로변에서 살짝 벗어난 이층에 자리한 덕분에 좀처럼 뜨내기손님도 오지 않는 매력적인 주점이었다.


가게 최고의 명당은 단연 우리가 즐겨 앉는 주방 앞 바 테이블이었다. 주문받은 음식이 완성되면 주방장은 그것을 이 테이블 옆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러면 지나가던 서버들은 주문 번호를 확인한 후 접시들을 들고 손님들에게 전달하곤 했다. 선반에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나오면 우리는 재빨리 주방장을 불러 같은 것을 주문하곤 했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가게에서 주문되는 모든 음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라면과 우동으로 빈 속을 채운 우리는 가볍게 사케 한 병과 꼬치구이 몇 개를 시켰다. 맥주를 마실 것인지 잠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추운 날씨 덕에 결국 따뜻한 사케를 마시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면을 먹고 배가 찬 상태였지만, 꼬치 외에도 간단한 타코와사(와사비에 절인 문어)와 게소카라(오징어 다리 튀김)까지 주문했다.


우리는 오징어 튀김을 우적우적 씹으며 번갈아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이년 전 워싱턴으로 이사를 간 후 오랜만에 만난 탓에 우리는 흥분한 상태였다. 스무 살 대학교 일 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난 학수와 나는 단짝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였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우리는 각자 살 길을 찾아 미국으로 유학을 왔고, 우연히도 뉴욕이라는 머나먼 타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로 외롭던 차에 졸지에 고향 친구가 되어버린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나는 친구를 사귀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미국에서 십 년을 넘게 살았지만 드넓은 미국 땅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열 명, 아니 다섯 명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 가운데 학수와 영규는 만난 지 이십 년 가까이 된, 단연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이들을 만나면 사막에서 물을 만난 것처럼 흥분되어 열아홉 살로 돌아간 것처럼 술을 퍼마시곤 했다. 타지에서 오가며 만난 사람들은 줄 수 없는,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짙은 정서를 그 친구들에게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닭똥집을 기름장에 찍어먹어야 할지, 아니면 쌈장에 찍어먹어야 할지 침을 튀기며 싸울 수 있는 기회는 이 곳에서 흔치 않았다.


고향의 정서를 느낀다는 핑계로 우리는 술과 안주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추가 주문을 외치고 있었다. 취기가 한창 오르자 우리는 주방 선반에 올려진 음식들을 보는 족족 주방장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자리에 접시와 빈 병이 쌓이기 시작했다. 모둠꼬치와 앗수부타(두꺼운 삼겹살)를 마지막으로 주방장은 문 닫을 시간이라며 우리를 쫓아냈다.


이차와 삼차를 거쳐 언제 숙소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숙소가 학수의 집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인사불성으로 새벽 다섯 시쯤 들어와 신발을 벗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내일 면접 따위 필요 없어. 난 오늘만 사는 남자야! 오늘만... 사는...




면접 준비는커녕 새벽 다섯 시까지 사케와 소주, 맥주를 셀 수 없이 퍼마시고 기적같이 아홉 시에 일어나 나왔으니 세수라도 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면접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팀장은 이제 대놓고 내 발표를 무시하고 있었다. 피로감이 몰려와 제시카의 빨간 스웨터가 검붉게 보였다. 꾸역꾸역 서로에게 고통스러웠던 삼십 분가량의 면접이 끝났고, 팀장은 검토 후에 연락을 주겠다는 말과 함께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해가 서쪽에서 뜨면 연락을 주겠다는 의미이리라.


제시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끝까지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무엇이 괜찮다는 것일까. 문득 그녀가 우리 동아리에 있던 어느 장난꾸러기 여학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시카, 당신은 알고 계시군요. 제가 어제 왜 그렇게 퍼마실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죠.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건물에서 정중하게 쫓겨났다. 정훈 선배, 미안. 약속을 못 지키게 된 것 같아.


열한 시가 다 된 터라 해는 꽤나 높이 올라 있었다. 바람도 아침보다 따뜻해져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배가 고파왔다. 그리니치 빌리지 Greenwich Village로 가서 부리또를 먹을지, 아니면 유니언 스퀘어 Union Square 앞의 쌀국수 가게에서 배를 채울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코리아 타운에 가서 설렁탕을 먹기로 마음먹었다. 설렁탕을 한 그릇 비우고 속을 추스른 다음 학수에게 전화를 하리라. 전화를 해서 오늘은 플러싱 Flushing에 있는 간판 없는 포장마차에서 연탄 불고기에 소주를 마시자고 하리라. 영규도 불러내어 아이돌 가수를 닮은, 귀여운 빨간 스웨터 소녀 이야기를 해주리라. 유부남이 무슨 주책이냐고 면박을 주는 영규를 붙잡고 내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리라. 그리고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비밀이 있어도 털어놓지 못하면 무슨 재미냐고 되려 화를 내리라. 그럼 학수는 혀를 끌끌 차며 내 소주잔을 채우겠지.


이리저리 공상에 빠져 6번가를 걷다 보니 어느새 코리아 타운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끌리듯 설렁탕 냄새를 따라 어느 작은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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