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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Jan 07. 2021

너무너무 일하고 싶어요

학교 컴퓨터실 아르바이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프린터를 사용하러 컴퓨터실에 들렀던 나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한 학생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일 년 먼저 입학했고, 두 학기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여기서 일할 수 있을지 묻자 그녀는 당연히 가능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입구 카운터 근처에 있는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컴퓨터실에서 일할 사람은 저기 카운터에 있는 마리아 Maria가 뽑아요. 이번 학기는 이미 사람을 뽑은 것 같지만 매 학기마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졸업을 하니까 분명 다음 학기에도 기회가 있을 거예요.”


나는 일하고 싶었다. 이미 한국에서 오 년 가까이 직장을 다녔던 탓에 돈을 벌지 않고 쓰기만 하는 생활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빠듯한 살림에 미술 재료값이라도 벌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일을 하면 사회보장번호 social security number를 받을 수 있었다.


사회보장번호는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유사한 개념으로서 미국 시민 혹은 미국에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이 갖는 고유번호이다. 사회보장번호가 없는 사람이 미국에서 은행 계좌를 열거나 보험에 가입하거나 각종 복지 혜택은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는 사회보장번호를 가진 사람만을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으로서 인정해주는 셈이다. 사회보장번호가 없는 사람은 운전면허도 발급해주지 않을 만큼 사회의 이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막연하게 진정한 사회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나의 생각은 역설적으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현실에서 기인했다. 영어도 못하고 인맥도 없고 경제적 신용도 없는 나였다. 미국 생활에 아직 적응도 못한 때라 크고 작은 차별도 심심찮게 당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남아 살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었지만, 당장 일상에서 은근하게 받는 사회적 왕따 취급은 그만 당하고 싶었다. 그리고 미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출발점은 사회보장번호의 획득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조금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나름의 일리는 있었다.


학생 비자를 가진 외국인 유학생도 인턴으로 미국의 회사에서 일할 수 있긴 했지만 학교에 갓 들어온 풋내기 학생에게 인턴 자리를 줄 회사는 없었다. 더구나 영어 실력이 회사 실무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인턴 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학교 컴퓨터실이 유일하게 도전해볼 만한 기회였다.


아르바이트생 선배가 먼발치에서 소개해준 마리아는 십 년 넘게 학교 컴퓨터실에서 일하고 있는 터줏대감이었다. 그녀는 화통하고 큰 목소리를 가진 중년 여성이었지만 조금은 변덕스러운 면도 있었다. 미국인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그녀도 남미의 이민자 가정 출신인 것 같았다.


컴퓨터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안면을 트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매일같이 컴퓨터실을 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른하게 기분이 좋은 오후 두 시 정도가 적당한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그녀가 앉아있는 컴퓨터실 카운터 앞에 서서 그녀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부터 그녀가 어제 본 영화, 주말에 새로 산 옷 등 시시콜콜한 잡담이 주를 이뤘다. 그녀가 나의 더듬거리는 영어를 참고 들어주듯이 나도 그녀의 사소한 신세한탄을 들어주며 맞장구를 치곤 했다. 


처음에는 그냥 여느 학생과 다르지 않게 나를 대해주던 마리아가 한 달쯤 지나자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종종 카운터 뒤 사무실 안에 서서 들어오라며 내게 손짓을 하고는 그녀가 먹던 오렌지 같은 과일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 때문에 한 번 사무실에 앉아 자리 잡으면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녀에게선 항상 짙은 외로움이 느껴졌다. 친해진 뒤부터 나는 주로 그녀의 말을 듣는 편이었다.


학교에서의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컴퓨터실에 들른 나를 향해 마리아가 손짓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학교 컴퓨터실에서 일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뉴욕시 최저 시급을 주는 일이지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가끔 프린터의 종이와 토너를 교체하는 정도 일을 하지만 대부분은 카운터에 앉아만 있으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꼭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음 주 월요일 두시까지 컴퓨터실로 오라고 했다. 


일주일 뒤 찾아간 컴퓨터실에서 나는 아르바이트생 면접을 치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면접 담당자는 마리아였다. 왜 이 곳에서 일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나는 말없이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피식 웃더니 다음 주까지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마리아로부터 ‘축하합니다’라는 글귀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받았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첫 주부터 출근하라는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기쁨과 안도감이 함께 교차하면서 맥이 탁 풀렸다. 자기야, 나 첫 직장 잡았어. 아내와 나는 모처럼 트레이더 조 Trader Joe’s에서 산 삼천 원짜리 레드 와인을 땄다.




디지털 이미징 센터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컴퓨터실은 100여 대의 컴퓨터와 몇 대의 고급 프린터를 구비한 디자인 전공 학생 전용 컴퓨터실이었다. 학생들은 주로 컬러 프린터로 과제를 출력하기 위해 이 곳을 찾았다. 때문에 나의 일은 주로 프린터를 사용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토너가 떨어졌다고 하면 창고에서 토너를 가져와 갈아 끼우고, 컴퓨터가 먹통이 되었다고 하면 컴퓨터 본체를 쥐어 패면서 고쳐주는 일을 했다.


컴퓨터실에서 반년 정도 일했을 무렵 에릭 Eric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학교 인하우스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학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해볼 생각이 있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마침 좀 더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한달음에 디자인 스튜디오로 향했다.


에릭은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미디어 아티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우리 학교의 디지털 디자인을 총괄하는 디자이너였다. 그는 학교 웹사이트를 새로 만들고 있는데 자신을 도와줄 인턴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학교 서버에 올려둔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을 했다고 했다.


에릭의 말에 나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나도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점이 가장 기뻤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영어 실력은 프로페셔널한 업무를 할 만큼 유창하지 못했다. 내 생각엔 나의 디자인 실력도 별 볼 일 없었다. 유일한 장점이라면 같은 학년의 다른 학생들보다 사회생활 경험이 조금 더 있고 생각이 좀 더 깊다는 정도였지만 그것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장점이었다. 오히려 나이가 많은 것이 단점이 아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학교의 인하우스 디자인 스튜디오는 학생들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인턴쉽은 아니었다. 뉴욕에는 워낙에 유명한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많기 때문에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학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것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곳이 어쩌면 나에게 꼭 맞는 인턴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에릭은 나 같이 미숙한 유학생들을 인턴으로 데리고 일한 경험이 많은 듯했다. 차분하고 인간적인 그의 성격도 내가 인턴쉽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학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의 인턴 생활에서 내게 주어진 일은 디자인이라기보다는 디자인 작업 언저리에 있는 일들이었다. 포토샵으로 사진 수백 장의 사이즈를 조정하거나 디자인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는 등의 업무였다. 그래도 컴퓨터실에서 일하던 내 처지에는 큰 진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디자인 스튜디오 내부적으로 사용할 마이크로 블로그를 만들고 싶다면서 에릭이 나에게 코딩을 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유학을 오기 전 웹 개발자로 일했던 나의 경력을 알고 있었던 에릭이 나에게 개발자로 일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다만 그는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는지, 내가 일주일 만에 결과물을 만들어가자 크게 놀랐다. 그 날 이후 에릭은 나에게 웹디자인과 개발에 관련된 ‘진짜’ 일들을 주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에 입학했던 2010년은 모바일 혁명의 원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뉴욕은 물론 미국의 디자인과 IT 업계는 애플 Apple Inc.의 CEO 스티브 잡스 Steve Jobs가 내놓은 아이폰 3 iPhone 3에 열광하고 있었다. 모바일 디자인, UX/UI, 리스펀시브 웹 responsive web 등 새로운 디자인 컨셉과 기술이 폭발적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당시에 등장한 개념들의 정의만 늘어놓아도 책 한 권이 나올만한 규모였다. 업계에서는 UX/UI 디자이너와 웹 개발자를 구하지 못해 난리법석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면접 과정에서 최신 트렌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는 대답만 해도 채용이 이루어졌다.


몇 번의 인턴 경험을 거쳐 마지막 학기가 되었을 무렵, 나는 디자인과 개발을 모두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얼마나 잘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긴 했지만 디자인과 개발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장점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바일 앱과 같은 하나의 완성된 제품을 만들 때 디자인과 개발 양쪽의 특성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디자이너는 작업의 효율을 극대화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업계에서는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유니콘 unicorn이라고 불렀다. 이력서 속 내 이름 앞에 나는 멀티디시플리너리 디자이너 multidisciplinary designer라는 수식어를 집어넣었다. 다방면으로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졸업 직전 마지막 학기는 1월부터 시작해 4월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방학 기간 중에 틈틈이 학점을 채웠기에 마지막 학기에 들어야 할 과목이 한 과목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한 과목마저도 저녁 여섯 시에 시작하는 시간표였기에 하루 종일 스케줄이 비어 있었다. 나는 학기 내내 미술관 투어를 다니거나 여행을 하면서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시간을 즐길 예정이었다.


2013년 새해가 시작되고 이틀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줄리아 Julia라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자신을 에디 Eddie의 프로젝트 매니저라고 소개한 그녀는 에디와 함께 일해볼 생각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에디가 나랑 일하고 싶다고?


뉴욕의 수많은 시각 디자인 스튜디오 중에서도 펜타그램 Pentagram은 업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스튜디오였다. 펜타그램의 파트너 마이클 비에이룻 Michael Bierut이나 폴라 쉐어 Paula Scher 같은 디자이너들은 업계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락스타 같은 존재들이었다. 폴라 쉐어는 우리 학교에서 외부 강사로 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수업에 등록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녀의 눈에 띄어 펜타그램에 취직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로 그녀 주변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펜타그램의 파트너이자 당시 뉴욕의 디자인 씬에서 가장 핫한 디자이너였던 에디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왜?’였다. 줄리아가 나의 이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뉴욕에 있는 수만 명의 새내기 디자이너들 가운데 왜 하필 나한테 연락을 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에디는 내가 작년 전시회에 출품한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 data visualization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어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나의 코딩 능력도 한몫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어느 실리콘 밸리 스타트업의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 프로젝트에서 일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나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감히 질문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에디는 9시부터 5시까지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주부터 출근하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 학기를 위해 세웠던 나의 계획들은 그 순간 모두 취소되었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에게 어느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같은 반 친구들이면서 동시에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처지이다 보니 미묘한 자존심 싸움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졸업반이 되면 인턴쉽이 정규직으로 이어지는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경쟁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펜타그램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나의 이야기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친구들에게도 놀라움이었다. 모두들 어떻게 나를 콕 집어서 연락했는지 궁금해했다. 왜 하필 (실력도 변변찮은) 나였는지도 궁금해했지만 나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졸업식 직전에 열리는 졸업생 취업 박람회는 디자인 전공만의 전통이었다. 과에서는 매년 큰 연회장을 대관하고 뉴욕의 대형 디자인 에이전시와 대기업의 관계자들을 초청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박람회 당일 자신의 졸업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연회장의 지정된 테이블에 앉아 업계 관계자들을 맞이해야 했다. 초청받은 관계자들은 연회장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학생을 발견하면 즉석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인터뷰를 보기도 했다. 인기가 많은 학생들은 한꺼번에 여러 명의 업계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어야 했다. 굉장히 잔인한 연회였다.


이미 펜타그램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던 내게는 부담이 전혀 없는 파티였다. 나는 이미 취직이 결정된 몇몇 친구들과 잡담을 하며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빈익빈 부익부처럼 내가 펜타그램에 취직했다는 사실은 많은 업계 사람들을 내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연회 초반부터 내 테이블 앞에 디자인 에이전시 인사팀 관계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관계자들로부터 자신들의 회사로 옮길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쉴 새 없이 웃으며 ‘죄송하지만 현재 있는 회사가 마음에 든다’는 대답을 반복하는 한없이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해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맞은편 테이블의 친구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부끄럽지만 당시의 나는 내가 곧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함께 앉아있는 졸업생 동기들 가운데 내가 최고가 될 것임은 물론 머지않아 학교의 다른 교수들을 뛰어넘는 최고가 될 것만 같았다. 거만하게 굴거나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진 않았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회가 끝날 무렵 에릭이 나에게 다가왔다. 학교 디자인 스튜디오를 그만둔 이후 처음 보는 터라 반갑게 인사했다. 에릭은 펜타그램에서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들떠 있던 기분에 나는 신나게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자랑질을 마친 뒤 나는 에디가 나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풀리지 않은 의문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에릭이 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내가 추천한 거야.”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학교의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에릭이 펜타그램의 에디와 아는 사이였다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학생들은 폴라 쉐어의 수업은 듣고 싶어 했지만 학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학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의 인연이 모두들 부러워하는 회사 취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니 세상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에릭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세상 쿨한 에릭은 특유의 조용한 미소를 보이며 손가락 두 개를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대고는 사라졌다.


나는 그곳에서 일 년 반을 일한 뒤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되는대로 했던 선택들이 나를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이리저리 표류하는 돛단배 같았다. 선장이랍시고 키를 쥐고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 의도대로 배가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학교 인하우스 스튜디오에 들어갔던 선택은 나를 세계 최고의 디자인 에이전시 취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간 세계 최고의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나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진 못했다. 물론 ‘최고’라는 말은 상당히 주관적인 표현이긴 하다.


졸업 후에도 나는 펜타그램에 남아 계속 일했다. 에이전시는 항상 바빴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심했다. 뉴욕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동료로 둔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에디는 때때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일 년 반을 일한 뒤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는 지금도 가끔 연락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이제 꿈결처럼 희미하다.



뉴욕에서의 학교 생활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들은 아래의 연재를 통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내가 뉴욕의 디자인 스쿨에서 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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