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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Jan 23. 2024

엘리자베스 핀치

좀 다른 사랑 이야기

어떤 사람에게 훅 빠져서 그 사람의 모든 말을 믿고 그 말에 따라 행동할 만큼 존경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책을 좋아한다면 철학자 문인 등 지식인에게 그런 감정이 들 수 있고, 사람을 좋아한다면 정치인 연예인 등 인기가 있는 사람을 따를 수 있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부모나 선생님에게 그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을까? 줄리안 번즈(Julian Barnes)의 소설 "엘리자베스 핀치(Elizabeth Finch)"를 읽으면 핀치 선생님에게 반한 닐(Neil)이란 학생을 만날 수 있다.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 선생님을 기리며 그녀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정리한 내용이 소설이다. 그럼 둘 사이에 혹시 무슨 애틋한 로맨스라도 이뤄지나? 그런 건 없다. 그러나 닐이 핀치 선생님을 사랑한 건 맞다. 닐은 EF(소설에서 선생님을 이렇게 부른다)가 “내 친구였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존재와 본보기는 내 두뇌에 변화를 가져왔고, 세상을 이해하는데 비약적인 도약을 촉발시켰다”(p, 177)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핀치 선생님은 닐의 멘토였던 것 같다.


소설은 3막 구조 연극처럼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닐이 성인 교육 센터에서 핀치 선생님의 “문화와 문명”이란 수업을 일 년간 수강하며 그녀에게 매료되는 이야기부터 20년 후 그녀가 병으로 사망하고 닐에게 책과 노트 등을 유산으로 남기는 이야기까지다. 닐은 30대 중반에 핀치 선생님을 처음 만난다. 선생님의 얼굴이나 몸매 묘사는 없다. 그저 변함없는 길이의 회색 머리, 한 가지 모양의 블로그(Brogues) 신발만 신고, 스타킹으로 다리를 가리고, 치마는 항상 무릎 아래 길이로 입었단다. 게다가 불가사의하게 차분한 자세로 완벽한 문법적인 문장을 명확하게 구사해서 “실제로 쉼표, 세미콜론 및 마침표를 거의 들을 수”(p.6)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 대목에서 난 로봇이 생각났다. 이런 사람 좀 어렵지 않나? 그러나 핀치 선생님은 "너그럽다 (forgiving)". "기품이 있다(high-minded)". 닐은 살면서 한 번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핀치 선생님을 만난 게 인생을 바꾸게 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닐은 핀치 선생님의 모든 말을 필기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언젠가 선생님이 책에서 어떤 인물을 세 가지 형용사로 축소해서 묘사한다면 믿지 말라고 한다. 닐은 형용사를 쓸 때마다 그 말을 상기한다. 그러나 정작 선생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준 과제를 하지 못한다. 과제를 하려고 하면 잡생각이 든다. 이혼 후 처리해야 하는 경제적 문제 아이 문제로 골치가 아프다. 닐은 핀치 선생님을 실망시킨 걸 사과한다. 그리고 용기 내서 선생님에게 점심 데이트를 신청한다. 그 후 그들은 20년 동안 일 년에 두세 번 만나 정확히 75분간 동안 식사를 하며 대화하고 헤어진다. 점심값은 늘 선생님이 낸다. 첫 질문도 선생님이 한다.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건가?” (p. 38). 닐은 이상하게 핀치 선생님 앞에서 자신이 더 영리해지고 설득력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p. 38). 그러나 선생님은 연락도 없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선생님이 사망하고  닐은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오빠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선생님이 왜 책과 노트를 유산으로 물려줬는지도 몰랐다. 핀치 선생님은 과연 누군가?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서 그녀가 남긴 글에서 단서를 찾는다. 그러다가 노트 맨 위에 "31세에 죽은 제이(J)"라는 메모를 발견하고 선생님의 옛 애인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핀치 선생님의 글을 읽고 퍼즐이 맞춰진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싶다면 '굴하지 않는 영웅'이라고 신문에 났을 법한 줄리안을 고려해 봐라.“(p. 68). 그렇다. 제이는 바로 배교자 줄리안 (Julian the Apostate)이다. 선생님은 20년 전 수업 시간에서도 그를 몇 번 언급했었다. 그리고 도서 목록과 서적을 다시 확인하니 선생님이 자신에게 그걸 준 이유를 알 것 같다. 20년 전 제출하지 못한 리포트를 쓰라는 메시지 같다. 그래서 책의 2부는 배교자 줄리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 같은 내용이다. 50페이지나 되지만 읽을만하다.


3부에서 닐은 핀치 선생님의 전기를 쓸 요량으로 선생님을 알던 사람들을 만난다. 우선 선생님 오빠에게 가족사를 듣고, 선생님의 노트를 읽고, 20년 전 수업을 함께 수강한 안나에게 연락한다. 닐은 맨다리도 노출하지 않았던 선생님이 수영을 잘했다는 안나의 말을 듣고 놀란다. 안나가 자기보다 선생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 같아 부럽다. 반면 강사가 된 제프는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다. 초기 기독교에 관해 너무 집착했고, 독창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아마추어였고, 기발한 주장은 적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닐이 선생님에게 너무 열중해서 그녀를 신화로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신화? 2부에서 배교자 줄리안은 수세기에 걸쳐 이런저런 작품에 대두하며 신화가 된다. 과연 줄리안이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은 정복하였습니다" (p. 74)라는 말을 했을까? 그러나 테오도레트는 줄리안이 사망하고 100년도 훨씬 더 지나서  <<교회사>>라는 책에 그렇게 적었다. 결국 닐은 역사에 대한 이해나 개인사에 대한 이해가 누군가에 의해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전에는 역사적 사건을 곧이곧대로 믿고 감동했는데 역사적 자료도 지배적인 생각의 산물이니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나라나 신화 같은 역사가 필요하고 용감하고 정의롭고 지혜로운 인물이 신화가 된다.


과연 닐은 핀치 선생님의 전기를 썼을까? 결론은 말하지 않겠다. 비록 178쪽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지만 역사 종교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정보 습득 면에선 알차고, 핀치 선생님의 강의 내용도 흥미롭다. 그러나 인물이 성장하거나 반전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안타까운 건 닐이 너무 고상하고 범접할 수 없는 선생님을 롤모델로 삼은 탓인지 50대 중반이 되어서도 별로 변한 게 없다고 자책한다. "그녀의 지속적인 존재, 심지어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 삶을 계속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어." (p. 169). 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두 번 이혼했고 엄마가 다른 3명의 자녀가 있다고 했다. 핀치 선생님은 평생 독신으로 금욕주의자처럼 살았는데 닐은 그렇지 않았다는 건가?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엔 닐이 특별히 잘못 산 것 같지 않다. 다만 닐은 분명히 핀치 선생님 덕분에 "두뇌의 변화"가 있었고 세상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지적 능력 함양과 행동 변화는 무관한 건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걸 행동으로 실천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다. 그래서 습관이 쉽게 변하지 않는 거다. 그랬다면 술 담배 등 각종 중독이나 폭력성과 같은 위험한 습성이 어렵지 않게 고쳐질 거다. 물론 중독 문제는 좀 더 심각한 생화학적 변화도 있지만... 아무튼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능력이 다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며 살아내면 된다. 아마도 닐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자책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했던 닐이 배교자 줄리안에 관한 글을 끝냈으니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건 닐이 신화로 만들 만큼 좋아했던 핀치 선생님을 만난 덕분일 거다.


<참고자료>

Barnes, J. (2023). Elizabeth Finch. Vin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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