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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Oct 25. 2024

팔자 좋은 미숙

8회

“… 사실 … 사실은 제가 또마를 따로 1년 가까이 만나고 있었어요.”

속으로 미숙은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표시 내지 않았다. 그보다 정민이 준비되었을 때 그다음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드럽게 바라만 봤다. 

“그러니까… 우연히 전철에서 또마를 만난 적이 있었어요. 언니가 알려준 강남 피부과에서 관리를 받고 나와서 얼굴이 조금 부어 있어서 아는 척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마가 먼저 아는 척을 했어요. 그리고 저녁 수업에 가기 전까지 2시간 있다고 해서 함께 간단히 식사를 했어요. 그리고 몇 번 그렇게 만났어요. 언니가 알다시피 또마는 한국말도 잘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굳이 프랑스어로 말하지 않아도 됐죠… 있죠… 사실은 저… 그러니까 저 지금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에요.

“어쩌다…” 미숙은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언니에게 말 안 했지만 사실 저 큰 아이가 언어 장애가 있었어요. 만 3살 때 아이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몇 개 밖에 말할 수 없었죠. 자기 이름도 말하지 못했어요. 자기 또래보다 2살 정도는 느렸을 거예요.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일반 학교에 다니지만… 저도 언니처럼 공부 잘하는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기대했어요. 저도 중학교 때는 늘 전교 1~2등이었고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전교 10등 안에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S대 경제학과에 들어갔죠. 남편은 같은 과 복학생이었어요. 저는 막 2학년에 올라갔을 때였고.. 시댁은 강남에 건물을 갖고 있는 부자여서 우리 둘이 뉴욕으로 유학을 가도록 지원해 줬어요. 그런데 제가 임신이 되고 임신중독증이 와서 공부를 할 수 없었어요.” 정민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시댁은 큰애가 학습이 부진한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어요. 자기네는 그런 병을 가진 사람이 없대나 뭐래나… 그러면서 우리 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언니, 제가 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한 지 아세요? 아이 때문이었어요. 아이만 보고 있으면 갑자기 너무 우울해서 자살까지 생각했어요. 아이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하면서도 내 아이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냈어요. 아이와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온전히 제 할 일에만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죠. 새로운 걸 배워보는 게 좋다는 말을 듣고 프랑스어를 시작했어요. 프랑스어를 공부할 때는 아이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공부를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가면 말귀도 잘못 알아듣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더 잘해줬어요. 다행히 아이가 온순해서 말귀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썽을 피우지 않아 어린이집에서 잘 지냈어요. 처음에는 방송통신대에서 온라인 강의를 들었어요. 그렇게 쉬엄쉬엄 4년을 공부하고 큰 애가 일반 학교에 들어가 1년을 무사히 마치고 나자 마음에 여유가 생겨 프랑스 학원에 등록한 거예요. 큰애와 2살 차이로 태어난 딸아이는 오빠보다 모든 게 빨라서 시댁에서 좋아했죠. 그러나 시댁에선 딸처럼 영민한 아들을 한 명 더 낳아야 한다고 강요했어요. 저는 아이를 더 이상 갖고 싶지 않았어요. 솔직히 아들을 낳으면 또 큰애 같을까 걱정도 됐어요… 그런데 남편마저 아들을 원하는 눈치였어요. 가끔 동네 산책을 할 때도 아들은 엄마하고 집에 있으라고 하고 딸하고 둘이서만 나갔죠… 저도 한때 큰애에게 정을 줄 수 없어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온 귀한 생명이잖아요. 어떻게 하든 잘 교육시켜 우리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하는데 남편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서 헤어지기로 했어요… 딸은 아빠와 살고 우리 아들은 나와 살고…”

“너무 힘들겠다… 그래서 프랑스 학원에 안 나온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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