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다시 한국에 정착한 지 8년이 넘자 미숙은 일상에서 영어를 쓸 일이 없어서 점점 영어 말하기가 어색해지는 걸 느꼈다. 독서 토론은 잃어가는 영어 회화 연습도 하고 책 토론도 할 수 있어서 코로나 기간 동안 밋업(meetup)을 통해 미국인이 이끄는 독서 모임에 가입했었다. 처음에는 미국에 있는 독서토론에 참여했으나 시차 때문에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해서 한국에서 미국인이 이끄는 독서 토론에 참여하게 됐다. 코로나 기간에는 온라인으로 모여서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도 참여하여 유창한 영어 독서 토론이 이뤄졌지만, 코로나가 끝나고 대면 모임으로 바뀌자 주최자와 한두 명의 외국인을 빼면 모두 한국인이어서 언어장벽이 느껴졌다. 외국인마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와서 한국인보다 영어를 더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가끔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 교포가 참석했지만 그들은 한 번 참여하고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한국인은 대부분 영어로 독서 토론을 할 영어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미숙은 그들의 서툰 영어보다 생각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잘 들어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미숙이 발언할 때 잘 경청했다. 나이 든 사람이 차분하고 편안하게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전달해서 설사 그 내용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미숙이 이 모임을 특히 좋아하는 건 스티브의 독서 목록이다. 스티브가 아니었다면 미숙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고고학자 데이비드 웬그로우가 쓴 <<모든 것의 새벽: 인류의 새로운 역사(The Dawn of Everything: A New History of Humanity)>>같은 책을 읽어보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스티브가 미숙에게 사사로운 관심을 보이는 게 불편했다. “책이 좋으면 집에서 조용히 읽으면 되지 왜 미국인과 떠든다고 그런 곳에 가입해서 독서 토론 이외의 시간에 메시지를 받게 만드나?” 미숙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후 동네 도서실에서 여성 도서관장이 이끄는 독서모임에 나갔다. 참석자는 모두 동네 주부나 미혼 여성이었다. 모두 미숙보다 적어도 10년 이상 젊은 사람이어서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미숙이 미국시민권자라는 사실과 아이들이 모두 미국에서 공부를 잘해서 큰아들은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과정에 있고 작은 아들은 형과 같은 주 의대를 다니는 것을 부러워했다. 미국인이 이끄는 독서모임에 나가 영어회화 연습을 할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동네 도서실에서 여성끼리 책에 관한 담소를 나누는 건 마음이 편했다.
이런 미숙이 어째서 5년 전에 프랑스어 학원에서 만난 또마에게 설레었을까? 티브이에 나온 또마를 보며 미숙은 그때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모범생 아이들은 일찍이 자신의 진로를 찾아 스스로 잘 커가고, 태식은 명의에 출연하여 환자가 더 많아질 즈음 미숙은 대학교 때 전공한 프랑스어를 다시 공부해서 프랑스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 등록했다. 오랫동안 프랑스어를 하지 않아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시작한 지 2년 가까이 되자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할 수 있었다. 여자 원어민 선생님이 프랑스로 돌아가서 또마의 반에 등록한 거다. 매주 수업에 참여하며 말하기가 향상되는 게 느껴졌다. 그건 수업시간 이외에도 프랑스방송을 보고 듣고 쓰는 활동을 계속한 결과일 거다. 그리고 어느 날 또마가 함께 해변에 가자는 말을 한 거다. 미숙이 자신보다 한참 어린 또마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건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그때<<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을 읽고 있어서 그랬을까?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푹 빠진 게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그러나 엘리오는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청소년이 아니던가? 그런데 남편 밖에 모르던 50대 후반의 미숙에게 왜 그런 기분이 든 걸까? 또마는 적어도 미숙보다 15살은 어렸을 거다. 거의 아들 같은 남성에게 그런 감정이 들다니… 또마와 마지막 수업은 정민의 고백 말고는 생각나는 게 거의 없다.
그날 미숙이 수업 시간에 조금 늦었다. 판서를 하고 있던 또마가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리며 미숙을 보고 얼굴 이 갑자기 밝아졌다. “봉주르 미숙” “데소레, 쥐쉬 엉 르다르(Désolée. Je suis en retard.” 저 사람 나를 보고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다른 학생들이 의심하겠다. 미숙은 의식적으로 교실을 둘러보며 영식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그는 오지 않았다. 대신 정민이 무표정하게 미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민이 앉은 조에 한 자리가 비어 미숙은 그쪽으로 가서 앉았다. 안면 트기(Brise-Glace) 활동으로 빙고를 하고 있었다. 조원이 돌아가며 프린트에 나온 질문을 하고, 상대방이 그렇다고 말할 경우 자신의 이름을 칸에 적었다. 자신의 이름이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연결되면 이기는 게임이다. 미숙이 정민 옆에 앉아, 정민 앞에 있던 학생이 물었다.
정민, 유럽에 간 적 있어요?
물론이죠. 두 달 전에 파리에 갔었어요.
거기서 뭐 했는데요?
차를 렌트해서 에트르타에 가서 해변에도 가고 르 벨 아미(Le Bel Ami)라는 맛집에 가서 문어 요리도 들렸어요.
정민 앞에 있던 학생은 빙고 종이에 "유럽을 여행해 본 적이 있나요?(Avez-vous déjà voyagé en Europe ?)"라고 쓴 질문이 들어있던 칸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미숙은 정민이 '에트르타'라고 말할 때 그곳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정민이 미숙에게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수업시간 내내 정민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매일 병원에 살다시피 하는 남편이 특별히 미숙을 찾을 일도 없어서 미숙은 정민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정민은 잠깐 차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정민은 프랑스 학원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서 위치한 한 카페에 앉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언니, 저… 큰일 냈어요. 언니는 제 큰언니보다 나이가 많으니 이런 상황을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프랑스 학원에 못 나올 것 같아요.”
“무슨 일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