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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Oct 25. 2024

팔자 좋은 미숙

6회

미숙과 태식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건 서울에 대기업이 지은 대형병원이 두 개 생겨서 이뤄졌다. 새로 지어진 병원 중 한 곳은 한국인에게 인기가 있던 명문 대학병원을 빨리 따라잡기 위해 월남전쟁 중 미국으로 이민 간 서울의 명문 의대 출신 의사들을 영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미국에 간 의사들은 대학병원에서 일하기보다 개업한 경우가 더 많았다. 게다가 월남전이 끝나고 일 년 후 외국의대 출신 의사가 전처럼 손쉽게 미국 영주권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한국 의대를 나온 사람이 미국 의사가 되는 길은 거의 막혔다. 오로지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와 결혼하거나 부모형제자매 초청으로 미국에 와서 미국이 인정하는 외국의대 출신만이 시험을 볼 수 있었고, 수련의 과정에 응시하여 수련을 마치고, 또 시험을 보고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 의대 출신의 젊은 의사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 새로 생긴 병원은 미국의대에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60대 한국 의대 출신 교수를 대거 영입했다. 그들은 미국에 30년 가까이 살아서 미국에 익숙했고 한국에 부모 형제도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국이 늘 그리웠다. 그래서 60대 의대 교수들은 미국에서 연마한 첨단 의술을 한국에 전파하여 한국의 의학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려줄 수 있다는 사명감 못지않게 한국에서 몇 년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그러나 태식이 한국으로 돌아간 건 조금 다른 이유였다. 펠로우를 했던 대학병원에서 조교수로 남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서 처음에는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이 든 어머니마저 초기 치매라는 둘째 누나의 말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가 사는 건 어떨지 미숙에게 물었다. 미숙은 한국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었다. 태식이 근무하는 버펄로 대학병원은 신경외과에 한 저명한 의사 덕분에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매년 한국에 있는 의대 교수들이 안식년을 받아 가족을 데리고 와서 일 년간 지내다 갔다. 그런 젊은 의대 교수 부인들과 나이가 비슷했던 미숙은 그들에게 큰 아이를 맡기고 병원에 나가 일하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 음식 한 가지씩 준비해서 돌아가며 한 집에 모여 음식도 나눠먹고 수다도 떨었다. 일 년이 지나면 한 무리의 가족이 떠나고 새로운 가족들이 오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쫓아가고 싶을 만큼 잘 지냈다. 그래서 태식이 한국에 가서 몇 년 살아보자고 할 때 흔쾌히 동의했다. 게다가 적어도 5년간 살 집을 제공해 준다고 해서 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태식은 병원에 출근했다. 미숙은 한국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의 생일을 크게 치렀다. 시어머니와 친척 50여 명을 호텔로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미숙이 한국에 와서 가장 좋은 건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다. 옛날에 미숙을 기억하는 동창을 만나는 일도 재미있었다. 대학동창들은 미숙보다 결혼도 일찍 하고 아이도 일찍 낳아 막내가 벌써 초등학생인 친구도 많았다. 버펄로에 살 때는 자장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 한 시간이나 운전하고 가야 했는데 전화만 하면 짜장면이 문 앞에 배달되는 것도 너무 편리했다. 처음 몇 년은 동네에서 가까운 이 식당 저 식당을 찾아다니며 저렴한 음식부터 코스 요리까지 다양한 한국 음식을 맛보는 게 신이 났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한국에서의 삶은 미국에서 직장에 다닐 때보다 더 힘들었다. 미국에 사는 큰 시누이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늘 미숙에게 다정했다. 태식의 매형이 시카고 병원에서 은퇴하고 자식들이 사는 하와이로 이주하고 난 후에도 태식에게 비행기표까지 보내주며 놀러 오라고 해서 미숙은 첫째를 데리고 하와이에 놀러 갔었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둘째 누나는 달랐다. 미숙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식이 미국에 가지 않았으면 태식을 탐내던 아무개 사장 딸과 결혼했을 거고, 한국에서 빌딩 한 채 갖고 잘 살며,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매일 아들을 너무 보고 싶어서 정신을 잃은 거라고 했다. 그래도 둘째 시누이는 미숙을 큰며느리보다 덜 만만하게 봤다. 미숙은 한국에 오자마자 큰 동서의 흉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미숙이 보기에는 큰 동서는 효부였다. 시어머니가 60세도 되기 전에 산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큰 동서는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을 맡았었다. 그렇게 가사를 시작하여 20년이 넘게 시부모를 모셨다. 그 시간에는 태식이 미국 가기 전까지 그리고 둘째 시누이가 시집가기 전까지 함께 산 시간도 포함됐다.


태식이 한국에 돌아온 지 이 년 만에 84세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태식은 어머니와 겨우 2년밖에 살지 못해서 안타까웠지만 치매가 깊어져서 자식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기 전에 돌아가신 건 어쩌면 어머니의 단정한 성격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늘에서 도와준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둘째 누나는 큰며느리와 미숙이 제대로 간호하지 않아 폐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신 거라고 원통해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둘째 시누이이와는 시부모의 제삿날 이외에 왕래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8년 정도 산 어느 가을 미숙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갑자기 미국이 그리웠다. 지금쯤 미국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하여 월마트에 가면 각 학교마다 준비물이 적힌 가판대 아래 학용품을 팔 텐데… 그리고 애플 피킹이나 펌킨 피킹도 가겠지.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요리를 하고 한인들은 이웃까지 초대하여 뷔페 파티를 하고. 블랙 프라이데이에 쇼핑하고. 추수감사절 데커레이션을 거두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준비하고… 미숙은 아이들을 계속 한국에서 공부시킬지 미국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미숙은 부모님과 의사가 된 동생이 사는 시카고에 가고 싶었다. 태식은 미숙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는 걸 원치 않았으나 미숙의 설득에 못 이겨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다. 중간에 안식년을 맞아 1년간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태식은 아이들보다 미숙이 더 그리웠다. 다행히 영특했던 막내가 월반하여 만 17세에 형과 같은 대학에 입학하자 미숙은 매년 미국과 한국을 오고 가는 생활을 정리하고 5년 만에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그리고 매년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한국에 들어왔고 부모님과 동생도 자주 한국을 방문해서 미국에 갈 일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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